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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북에 종이책 부활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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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면

①,② 스웨덴 자연주의 레스토랑 ‘파비켄 마가시네트’의 요리책 「파비켄」(파이돈 출판). 세계 3대 아트북 출판사 중 하나인 파이돈의 책은 홈페이지에서 주문 가능
③ 고야드 트렁크에 담은 애술린의 한정판 시티 가이드북
④ 그림 형제가 1850년대에 집필한 독일어사전을 소설 「양철북」의 귄터 그라스가 재
해석해 만든 책
⑤ 타셴의 대표작 중 하나인 「100 컨템포러리 아티스츠」. 현대미술작가 100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이스트(EAST)관 3층. 해외 럭셔리 브랜드가 즐비한 이곳에 지난달 책방이 생겼다. 미국 최대 오프라인 서점 반스앤노블이 매장 30%를 줄이기로 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책 장사가 하락세인 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일반 서점이 아니라 프랑스 명품 서적 브랜드인 애술린 부티크다. 현대카드는 1년여간의 준비 끝에 지난달 가회동 북촌에 아트북 1만여 권을 갖춘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개관했다. 그런가 하면 아트북의 전설로 통하는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 전시회가 서촌의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디지털의 첨단을 달리는 서울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일깨우는 아트북, 그 세계로 들어가봤다.

⑥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가 소장한 패션·건축·전시 관련 아트북

15일 오후 통의동(서촌) 대림미술관. 17세에 독학으로 인쇄술을 연마한 독일의 인쇄 장인 슈타이들이 예술가들과 협업한 과정을 담은 슈타이들전(How to Make a Book with Steidl)이 열리고 있다. 김민정(33·마포구 서교동)씨는 미술관 2층에서 『양철북』의 귄터 그라스가 관여한 한 아트북 표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예술 분야의 이미지를 잘 표현한 아트북을 보면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아요.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책 속으로 들어간다고나 할까요.” 김씨는 또 “활자 책은 대체로 작가 의도를 그대로 읽게 되지만 아트북은 보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슈타이들이 잡지 월페이퍼의 제안을 받아 향기 나는 종이로 만든 향수 페이퍼 체험장을 둘러보던 고우리(22·동작구 신대방동)씨는 “푸드 스타일링에 관심이 많아 아트북을 자주 본다”며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 전시회에선 샤넬 수석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가 샤넬 고유의 리틀 블랙 재킷을 입은 유명인 100여 명의 사진을 직접 찍어 만든 아트북 『블랙 리틀 재킷』도 만날 수 있다. 팝 아티스트 짐 다인 작품집과 에르메스·롤스로이스를 기록한 사진작가 코토 볼로포의 아트북도 선을 보인다.

 

⑦ 샤넬 검정 재킷을 입은 100명의 명사 사진을 수록한 「더 리틀 블랙 재킷」. 샤넬의 수석 디
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직접 사진을 찍고 책을 기획했다.(슈타이들 출판) ?
⑧독일 괴팅겐에 있는 슈타이들 출판사 `슈타이들빌레` 의 작업실

사실 지난달 개막한 슈타이들 전시 이전부터 국내에선 이미 아트북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세계 3대 아트북 출판사로는 독일 타셴(TASCHEN)과 영국 파이돈(Phaidon), 프랑스 애술린(ASSOULINE)이 꼽힌다. 애술린은 2011년 한국지사를 설립하고 지난해 8월 아시아 최초로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에 애술린 라운지를 열었다. 서점 안에 브런치를 먹을 수 있는 카페와 전시공간을 더한 형태다. 박지현 애술린코리아 대리는 “여성 고객은 인테리어와 아트, 남성은 건축과 사진책을 주로 찾는다”고 소개했다.

 럭셔리 브랜드가 즐비한 첨단 유행의 거리에 둥지를 튼 것은 이 공간이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고급 아트북을 접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갤러리아백화점이 68.5㎡(20.7평) 규모의 애술린 부티크를 만든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곳에선 패션·사진·건축·명품 등 다양한 주제의 아트북을 보며 샴페인을 마실 수 있다. 제정경 갤러리아 라이프앤컬쳐팀 바이어는 “미국 삭스나 니먼 마커스 등 고급 백화점에도 애술린이 입점해 있다”며 “고급을 지향하는 백화점과 애술린의 이미지가 잘 맞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책 매출에 거는 기대보다 고객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국내는 아트북 불모지였다. 타셴 수입사인 마로니에북스의 남무현 마케팅 차장은 “아트북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부 전공자가 공부를 위해 보거나 외국에 나가야만 접할 수 있었다”며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도래한 2000년대 후반부터 예술과 문화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아트북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고 말했다.

 슈타이들 전시를 기획한 권정민 대림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요즘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 그냥 보고 끝내는 게 아니라 작가의 관련 아트북을 찾는다”며 “미술 전공자뿐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⑨ 갓 인쇄한 종이 냄새를 담은 향수 페이퍼 「페이퍼 패션」. 디자인 잡지 월페이퍼와 슈타이들이 함께 만들었다. 향수 조향사 게자쇤이 향수 포장에 쓰인 책을 들고 있는 모습.

 
아트북에 대한 관심은 최근 문을 연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인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수석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의 조언을 받아 1만1000여 권의 아트북을 비치했다. 동시에 50명만 입장할 수 있어 주말이면 한 시간 이상 기다리기도 한다. 라이브러리 관계자는 “지적인 공간을 통해 고객에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게 한다는 게 회사의 취지”라고 말했다. 이곳은 현대카드 회원과 동반 1인까지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이런 관심은 아트북 구매로 이어진다. 교보문고의 올 1~4월 디자인·사진 관련 서적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2.2% 늘었다. 정영민 교보문고 파트장은 “2~3년 전부터 해외 아트북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늘었다”며 “국내 서적보다 외국 서적이 많이 팔리는데 외국에 새로 선보이는 예술 분야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이 서점이 개최한 ‘제1회 월드 디자인 북 페어’에선 외국서적만 1억원 가까이 팔렸다. 서점 측도 기대보다 높은 매출액에 놀랐다고 한다. 분야별로 보면 건축이나 인테리어 책 매출은 주춤하고 제품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쪽이 뜨고 있다고 한다. 정 파트장은 “책 한 권에 자신만의 요리법과 패션, 인테리어, 소품 활용법 등을 모두 담은 라이프스타일 아트북도 인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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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북 시장은 급성장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아날로그 책의 부활 가능성을 따져보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대림미술관 권 큐레이터는 “e북이 등장해 인쇄출판업이 힘들다지만 종이에 인쇄된 책을 읽는 맛에 비교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많다”며 “디지털 기기를 통해 이미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지널 책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커졌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본 작자의 작품집을 실물로 보고 싶어 하거나 그 작가가 내한하면 찾아가 전시회를 관람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기류 속에 아트북은 문화를 손쉽게 즐길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로니에북스 남 차장은 “평범한 책은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지만 아트북은 사기 전 실물을 꼭 봐야 하는 독특한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가격이 매우 비싸 사기 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아트북은 테이블에 놓여진 자체로 오브제(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전시 준비를 위해 방한했던 슈타이들은 권 큐레이터에게 아트북의 효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테이블 위 아트북의 어떤 페이지가 펼쳐 있느냐에 따라 다른 무드가 연출된다. 그림은 단 하나의 이미지밖에 연출할 수 없지만 아트북은 각 페이지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트북은 오브제를 넘어서 여러 장르가 복합된 크로스오버 예술작품으로까지 대접받고 있다. 사진이나 문학, 미술이 책이라는 인쇄 분야를 만나 또 다른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계 3대 멀티 패션 편집숍 중 하나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10 꼬르소 꼬모 청담점에선 판매하는 제품의 디자이너 혹은 작가 스토리를 담은 책을 함께 전시한다. 숍 관계자는 “고객들이 아트북을 보며 힐링(치유)한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갤러리아 애술린 부티크에서 만난 황진희(45·강남구 압구정동)씨는 “평소 관심 있던 패션이나 인테리어 관련 아트북을 보면 잠깐 다른 곳에 여행 갔다 온 기분이 든다”고 했다.

 커피테이블에 놓고 남들에게 과시한다는 의미로 커피테이블 북으로 불리던 책. 아트북이 장식품이면 어떻고 예술작품이면 또 어떤가.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라는 캐나다 사진작가 로버트 폴리도리의 말을 떠올리며 아트북에 취해보면 어떨까.

김성탁·윤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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