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잘 해봤자 본전 번역의 재량 대체 어디까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소설가 김영하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한 번역 평가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4년 현재 확인된 이 작품의 번역본만 해도 역자 24명에 판본이 무려 52개나 된다. 남의 번역본을 윤문하거나 표절한 것이 상당수다. 2004년 이후에도 이 작품은 계속 번역돼 나왔다. 지난해 말에는 한 작가가 이 작품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판은 ‘번역’이라기보다 차라리 ‘번안’에 가까울 만큼 의역이 심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오역이 눈에 띄었다.”

영화 개봉과 맞물려 요즘 여러 출판사 간의 ‘번역 전쟁’이 한창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판(2009년 출간, 4만 부)과 민음사판(2003년 출간, 21만 부)은 최근 나란히 베스트셀러 상위권 안에 진입했다. 민음사판 번역자이자 1920∼30년대 미국 문학을 전공한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2010년 개정판 서문에 위와 같이 지적했다. 여기서 ‘한 작가’란 소설가 김영하를 가리킨다. 『오빠가 돌아왔다』『빛의 제국』등을 통해 흥미진진한 주제와 감각적인 문체로 이름을 날려온 그는 문학동네판으로 번역에 참여했다.

비판적인 건 김 교수만이 아니다. “피츠제럴드가 아니라 김영하가 느껴진다”는 얘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그는 대체 어떻게 번역을 했길래 ‘번안’이라는 비난을 듣게 됐을까. 번안의 사전적 의미는 ‘원작 내용은 그대로 두고 인명·지명 등을 시대와 상황에 맞게 바꾸는 것’이다. 이 경우에 맞춤한 표현도 아닐뿐더러 번역자한테 사실 상당히 실례되는 표현이다.

내겐 아주 오래전 누군가의 번역인지도 모르는 책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 팽개친 기억이 있다. 그래서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 문학동네판을 포함한 몇몇 출판사의 번역본을 비교해 가며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영하식 개츠비’는 내가 알던 ‘그 (재미없는) 개츠비’가 아니었다. 이 소설은 타임이 선정한 100대 현대 영문소설, 지금까지 영어로 씌어진 가장 뛰어난 소설 등의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 자타공인 명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그 정도로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늘 그 말이 작품의 탁월함보다는 술술 넘겨 소화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반어법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김영하식 개츠비’는 이런 의심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른바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슴 아프고도 덧없는 사랑 이야기는 한달음에 읽혔다. 손에 잡힐 것 같은 김영하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역동적인 문체 덕이다. 무엇보다 한 여자를 향한 사랑과 집착과 낙관이 지나쳤던 개츠비, 요샛말로 하면 ‘민폐 캐릭터’에 가까운 여자 데이지 등 등장인물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화자(話者)인 닉 캐러웨이와 데이지, 개츠비에게 ‘합쇼’나 ‘하오’체가 아닌 반말을 쓰게 한 건 무모했지만 꽤 성공적인 시도였다(서로에 대한 호칭은 ‘당신’으로 한다). 김영하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의 반짝이는 젊음과 치기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물론 ‘김영하가 느껴진다’는 강점은 뒤집으면 고스란히 ‘김영하밖에 안 보인다’는 단점으로 비칠 수 있다. 문학 사조나 시대 배경 등 원전의 맥락을 중시하는 ‘정파(正派)’가 본다면 이런 식의 번역은 ‘사파(邪派)’에 가까울 것이다.

번역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잘 하면 본전,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과잉 번역이나 축소 번역, 의역과 오역 논란에 시달리기 일쑤다. 김영하 역시 해설에서 “창작이 전차군단이라면 번역은 지뢰제거반”이라며 지난한 번역 작업의 고충을 털어놨다. 그의 번역이 원문 단어 하나하나에 충실한 ‘정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위대한 개츠비 』가 재미없다고 던져버린 사람들을 위한 번역본”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로 작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공만큼은 낮게 볼 수 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고전의 새로운 번역이 이 시대에도 계속 이뤄지고 이뤄져야만 하는 가장 큰 당위인지도 모른다. 이참에 단순히 ‘번역 전쟁’에서 그칠 게 아니라 번역이 시대 변화를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담아내야 하고 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생산적인 논쟁이 이뤄지면 어떨까 싶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시대와 언어의 벽을 힘겹게 넘는 과정에서 ‘재미없다’는 낙인이 찍혀버린 또 다른 진흙 속 진주를 발견하고 싶어서다.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