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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60년 그 산맥을 따라|「금성」의 동인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번에는「금성」지를 중심으로 한 몇시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금성」이 나온것은 1923년. 양주동(무애), 이장희(고월), 백기만(백웅), 유엽에 이상백, 손태가 참가한 것이 이채롭다.
「금성」이란 제호는 무애가 붙인것인데 신문화의 여명을 상징하는 「샛별」이란 뜻에 연애지상주의였던 동인물이 「비너스」를 동경한데서 온 것이라고한다.
불란서 악마주의 시인들의 작품과 「타고르」의 시를 번역 게재하는등 외국문학소개에 주력하는 한펀 창작시를 실었다.
창간호는 유섭과 무애의 합자로, 제2호는 유섭의 단독출자로, 마지막호는 무애가 대학을 1년쉬고 그 학비를 털어넣었다. 붓수는 1천부에서 1천5백부.
무애는 대학을 쉬는 동안 작품과 연애에 열을 올렸다. 강경애라는 문학소녀가 그의 상대였다. 처음엔 시를 쓰다가 19세때「인간문제」라는 장편소설을 신문에 연재하여 문명을 떨친 조숙한 작가였다. 무애는 상경길에 같은 고향인 소녀를 「휴대」하고 와서 청진동 「금성」사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 「루바시카」(러시아식복장) 차림에 장발을 하고 천재를 자부한 그는 작품은 언제나 자기것이 최고라는 걸작의식에 어여쁜 애인을 거느리고 그야말로 안하무인으로 활개를 쳤다고-.당시를 회고하면서 너털웃음을 웃는다.
유섭은 동경에서 있었던 어떤 여성과의 애정관계가 순조롭지 않아 학교(조대)를 그만두그 귀국한 뒤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전주출신인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멋쟁이였다. 미남인데다가 구변이 좋고, 노래를 잘불러 여자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금성」지의 발행인은 유택매자라는 일본여자로돼 있는데 유섭과는 보통사이가 아니었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잡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유섭이 그를 발행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천재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월 이장희. 날카로운 촉각을 곤두세우고 산뜻한 감각으로 반짝이는 작품을 짜낸 그는 27세의 새파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른동인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민족이니 사회의식이니하는 것을 속되다고 비웃는 고고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했다. 대구가 고향인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나 계모밑에서 자란 탓인지 늘 우울하고 말없는 청년이었다. 끝내 그 우울과 고뇌속에서 헤어나시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만것은 애석한 일이다.
감각파의 선구인 그의 작품에는「청천의 유방」「하일소경」등과 여기 인용하는「봄은 고양이로다」가 유명하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무애는 한국적 관념을 노래한 시인으로 서정적인 소곡에도 능했다.
이 나랏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사람의 자손이외다.(하략)
앞에 든 「나는 이나랏사람이로소이다」나 조선의맥박」은 민족의식이 짙게 스민 작품들이다.
백기만은 별명이 흰곰, 스스로 호를 백웅이라했다. 작달막한 키에 퉁퉁한 체격을 한 정열적인 시인이었다.
그의 시「만인의 도전」의 1절을 보면 그의 작품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전략)
나는 만인이다 - 반항아이니 새빨간 굵은 피가 끓어 오른다
도깨비장난이 요란한 이십세기의 천지에
새빨간 이 피를 뿌려주리라 (중략)
보아라 용자의 가슴에는 도전하는 미친 피가 가로 뛰노니 너희들 야영에 춤추는 악마들아 빨리 내영의 성전을 물러가라.
「금성」지는 처음부터 어떤 사조나 주의를 들고나오지않았고 동인들의 문학적 생리도 각기달랐다. 앞에서 본바와같이 세시인의 작품경향은 각각 이주적이면서도 그때까지 문단을횝쓸던 유행병인 우울, 퇴폐, 감상적인 풍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일이다.보다 밝고 보다 건강한 독자적 경지를 지향하러는 노력, 그것이 바로 「금성」지에 나타난 특색이라고 할수있다.(이기사를 도운 분=박종화·양주동· 백철제씨)<인태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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