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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물 없는 학교로' 직격탄 … 업자들 "문구상품권 제도 도입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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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에 고객을 빼앗긴 동네 ‘문방구’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천안·아산 지역 동네 문방구들을 찾아 그들의 애환을 들어보고 앞으로의 과제와 해결방안 등을 짚어본다.

천안직산초등학교 앞에서 30여 년이 넘도록 우리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조인호씨가 문방구 운영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다. 조영회 기자

#1 천안 직산읍 직산초등학교 앞에서 1979년부터 우리 문방구를 운영해 온 조인호(76·여)씨는 요즘 한숨이 부쩍 늘었다. 개학한지 두 달이 넘었지만 팔린 문구라고 해 봐야 공책 서너 권, 도화지 몇 장이 전부다. 10여 년 전만해도 등교시간이면 학용품이나 준비물을 사려는 초등학생들로 가게는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한산하기만 하다. 조씨는 “최근 들어 하루 매출이 만원도 안될 때가 많다”며 “가끔 가게를 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방구는 내 평생 일궈온 소중한 재산이기에 팔 수 없다”라고 하소연했다.

#2 2004년부터 천안 불당동 사당 초등학교 앞에서 한성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전미란(49·여)씨. 전씨 역시 조씨와 같은 처지다. 처음 문방구를 인수해 운영했을 때 보다 현재 매출은 70% 이상 급감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는 실내화와 체육복을 사는 학부모들 덕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지만 올해부터는 인근에 대형마트가 세 곳이나 문을 열면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대기업에서 종이(도화지 등) 한 장을 팔아도 더 싸게 팔기 때문에 장사하기가 진짜 힘들다”며 “이 인근에 우리 가게 이외에도 5개의 문구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3곳 만이 운영되고 있다”고 혀를 찼다.

‘재미있는 오락 게임, 즐겁게 뽑기 하던 재미, 친구들과 함께 가면 시간가는 줄 몰랐던 곳 정겨운 추억의 장소인 ‘문방구’가 잇따라 문을 닫고 있다.

동네 서점, 완구점에 이어 동네 문방구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것. 통계청에 따르면 1999년에 전국 2만6986개에 달했던 문구용품소매점은 2009년에 1만7893개로 3분의 1 넘게 줄었다. 대형마트가 급속히 늘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공책이나 연필 등 문구류를 사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천안과 아산지역도 마찬가지. 천안아산 학습준비물 유통인 협회에 따르면 천안·아산의 동네 문방구는 현재(2012년 12월 기준) 120여 곳. 1999년에 400여 곳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작 4분의 1만 운영되고 있다.

일반 사무실 인근에 있는 문구·팬시점은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편이다. 복사용지나 소모성 사무용품이 간간이 팔리기 때문이다. 반면 주택가와 학교 인근에 위치한 문방구 주인들은 “앞으로 뭘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온양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는 박모(45)씨는 “사행성이라는 비난은 있지만 뽑기나 게임용 카드 같은 거라도 팔지 않고서는 가게 운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준비물 일괄 구매로 영세 문방구 설 자리 잃어

조영회 기자

대형마트의 문구코너 입점, 초등학생 수 감소, 토요 휴일 지정 등도 문방구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지만 업계에선 2011년 본격 시행된 ‘학습 준비물 없는 학교’ 제도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교육청이 예산을 지원하면, 학교는 경쟁 입찰로 준비물을 대량 구매해 학생에게 나눠 주는 제도다.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맞벌이 가정 부모가 준비물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도입됐다.

현재 준비물 없는 학교는 전국 16개 교육청에서 모두 실시되고 있다. 천안 아산 교육지원청도 초등학교 학습 준비물 무상지원을 위해 학생 1명당 2~5만원 정도로 수 백억원의 지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일선 학교들은 최저낙찰제 방식의 공개입찰을 통해 학습준비물을 일괄 구매한 뒤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가격경쟁력이 있는 대형 유통상을 제외한 대다수 영세 문방구들이 설 자리를 잃어 가는 이유다.

천안아산지역 100개 문구 도·소매업체가 회원으로 있는 학습준비물 생산유통인 협회 이성원 사무국장은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은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영세 문방구도 함께 살리는 상생정책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현행 일괄 입찰방식이 아니라 문구상품권 지급 방식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 앞 문구점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정책적 배려가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바우처 제도 도입 … 교육 당국은 난색

상황이 이렇자 최근 교육계와 문구업계, 시민단체 등은 이 사무국장의 주장처럼 전통시장 상품권처럼 쿠폰을 지원하는 이른바 ‘바우처 제도’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천안아산 지역에서는 이미 관련 컨설팅과 상품권 도안까지 마친 상태다.

지난달 28일에는 전국유통상인연합회, 학습준비물 생산·유통인협회(천안) 회원들이 모여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전국문구생산·유통인 생존권 호소대회’를 열고 문방구의 어려운 실태에 대해 호소 했다.

이날 집회에는 전국에서 모인 영세 문구업자 500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학습준비물 지원제도와 4대악 척결 정책에 따른 문방구의 식품판매 금지로 생존권 위기에 몰렸다”며 “정부는 학교가 영세 문방구에서 학습준비물을 구매하도록 현 입찰구매제도를 고치고, 식품판매 금지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학습준비물 생산유통인 협회 방기홍 회장은 “학생들에게 문구전용 상품권을 나눠주고, 학생들이 직접 학교 앞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사도록 하자는 취지”라며 “용역을 의뢰한 결과 상품권 제도가 시행되면 학교와 문구점이 상생하면서 문방구가 연 20%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나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상품권 제도는 도입은어렵다는 입장이다.

 아산시교육 관계자는 “상품권 제도를 도입할 경우 누가 상품권을 발행하고 어떻게 나눠줄 것인지 등을 놓고 논란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또, “아이들에게 상품권을 나눠주면 학부모들이 또 신경을 써줘야 한다”며, “준비물 준비에 대한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뿐 아니라 심리적 부담까지 덜어주겠다는 제도의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교육당국은 다만, 어려운 문구업계의 사정을 감안해 소규모 구매물량에 대해서는 일선 학교들이 굳이 S2B를 이용하지 않고 학교 앞 문방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권고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방 회장은 이에 대해 “이미 있는 준비물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상품권 형태로 돌려서 상생을 해보자는 것”이라며 “제한적인 대책만으로는 문방구의 도태를 막기는 힘들다” 반박했다. 한편 천안아산 문방구 업계측은 가게 내 식품판매에 대해서도 정부에 규제완화를 촉구했다.

글=조영민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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