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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불가능한 시대 작품 속에서 새로운 사랑법 찾는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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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16면

도쿄 니키카이(二期會) 오페라단은 후지와라(藤原) 오페라단과 함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오페라 최고의 명가로 꼽힌다. 이 오페라단의 오사카 지회인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은 2005년 서울에서 탁월한 수준의 ‘탄호이저’를 선보여 일본 오페라의 저력을 실감케 한 바 있다.

도쿄 니키카이 오페라단 ‘맥베스’ 연출한 독일 거장 페터 콘비츠니

도쿄 니키카이 오페라단이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아 독일 연출가 페터 콘비츠니(사진ㆍPeter Konwitschny, 68)를 초청해 ‘맥베스’를 도쿄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러시아 지휘자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가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콘비츠니는 현재 유럽 오페라 연출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오페라 전문지 ‘오퍼른벨트’에서 5번이나 ‘올해의 연출가’로 선정된 유일한 인물이다. 연출하는 작품마다 도발과 유머감각, 파격으로 화제를 뿌려왔지만 정작 본인은 “연출해야 할 모든 내용은 작곡가의 음악 안에 들어 있다”고 굳게 믿는 ‘원작에 충실한’ 연출가다. 그는 또 극장의 교육적 기능(관극을 통해 관객은 스스로 사고하고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신뢰하는 브레히트의 전통에 서 있다. 1일 첫 공연을 보고 2일 콘비츠니를 만나 ‘맥베스’ 연출에 관련된 이야기와 연출관을 들었다.

이용숙(이하 이):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를 볼 때마다 11세기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살인과 유령 장면이 이어지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음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즐겁고 경쾌한 음악에 놀라곤 한다. 이런 극과 음악의 부조화가 많은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아왔고 또 연출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제 공연에서는 처음으로 음악과 극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듯해 새로웠다. 음악을 정확히 분석한 기발한 연출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콘비츠니(이하 콘): ‘맥베스’는 어둡고 쇼킹한 작품이다. 그래서 대개 그런 분위기로 연출한다. 하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그런 식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물론 국왕을 시해하는 장면의 음악은 충격적이고 끔찍한 느낌을 표현한다. 그러나 덩컨 왕이 맥베스의 집에 도착할 때의 음악이나 마녀들의 합창, 연회 장면 음악은 밝고 활기에 차 있다. 베르디는 왜 이런 음악을 썼을까? 이 음악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오페라 연출을 할 때는 먼저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 덩컨 왕이 한 침대에 있던 다른 두 명과 함께 살해당하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공연 내내 누군가가 살해될 때마다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려오고 붉은 꽃잎들이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콘: 솟구치는 꽃잎들은 피였다.

이: 물론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밝은 조명과 빛깔 다채로운 무대 덕분에 그런 장면들이 전혀 끔찍하거나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즐겁고 유쾌하게 보였다.

콘: 극중 누군가 죽을 때마다 마녀들이 진공청소기 들고 나와 흔적을 청소하는 것도 봤나? 그런데 청소기에 먼지를 빨아들이는 봉지가 달려 있지 않아 밑으로 다 샌다. 실제로 집에서 청소하다가 그런 실수를 했던 경험이 더러 있다(웃음).

이: 그런 유머감각이 음악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또 무대 왼쪽 앞에 놓인 칠판에는 바를 정(正)자가 가득 적혀 있고, 누군가 새로 죽을 때마다 거기에 마녀가 한 획씩 추가하는 것도 재미있다. 원래 베르디의 ‘맥베스’에는 마녀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번엔 마녀가 거의 모든 장면에 나온 것 같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인데, 오히려 마녀들이 주인공인 듯한 느낌이다.

콘: 사실이다. 무대 위에 마녀들이 거의 언제나 존재하는 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성 지배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연출의 기본 콘셉트이기 때문이다. 뭔가가 잘못돼도 남자들은 책임이 없다. 왜? 맥베스 부인이 시켰으니까. 실제로는 맥베스 내면의 권력욕이 그를 조종했지만, 여자들이 남자를 조종한다고 말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사악한 존재이니 남자는 자나 깨나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남자들은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핵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책임을 특정한 여자들에게 씌워 소외시키고 배척하고 화형에 처한 것이 유럽의 역사였다. 마녀로 화형당한 여자들은 일상의 특별한 지혜 또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지닌 여자들이었거나, 성적 환상을 실현하려 한 ‘강한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적 현실에서는 남성들에게 살해당했지만 완전히 죽은 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묘한 예언으로 남성들의 권력욕을 부추겨 결국 그들에게 복수한다.

이: 마녀들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며 거대한 압력솥 위에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는 장면 등 대담한 장면이 많았는데, 일본 여성가수들의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콘: 처음엔 연출가가 요구하는 마녀 역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았지만, 연습이 진행될수록 거부감이 사라지고 역할에서 오는 해방감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지휘자 베데르니코프가 작품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콘: 다른 지휘자였더라면 절대로 이처럼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주역과 조역 모두를 일본 성악가들이 노래했는데, 수준이 뛰어났다.

콘: 가수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스타 행세를 하지 않고 모두가 작품 전체의 부분이 돼 움직였기 때문에 연습 과정이 즐거웠다. 역할 이해와 연기 면에서 계속 발전이 느껴져 뿌듯했다.

이: 피날레 장면에서 덩컨 왕의 아들이 왕위를 되찾고 승리자들의 행진곡풍 합창이 울려 퍼질 때 반원형으로 된 경사 회전무대가 마녀들의 주방으로 바뀌면서 마녀들이 라디오로 그 음악을 듣고 있는 장면이 된다. 음악은 점점 희미하게 잦아들고 결국 암전되는데, 반전(反戰)의 유토피아를 암시하는 마무리인가.

콘: 그림자놀이로 보여준 제왕들의 연속 암살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 지배자들은 결코 왕관을 영원히 지키지는 못한다. 왕들은 가고 평민들은 남는다. 합창에 담긴 남자들의 호전성을 여자들이 비웃어주는 마무리였다.

이: 당신의 연출작들은 오페라 작곡가의 원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처럼 보인다. 때문에 당신은 이른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가가 극의 시대 배경·분위기·결말 등 많은 요소를 바꿔놓는 극)’의 대표자로 유명하다. 그런데 얼마 전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레지테아터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출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

콘: 레지테아터의 정의는 이야기하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리골레토’의 배경을 도살장으로 설정한다든가, 하여간 뭔가 센세이셔널한 요소가 있으면 그냥 ‘레지테아터’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런 연출 중에는 일관된 콘셉트 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작품도 많다. 그런 맥락에서 ‘레지테아터 연출가’라는 타이틀을 거부했다. 원작에 충실하다는 건 무엇일까. 200년 전 작곡한 오페라의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 의상과 지문을 그대로 살려야 하는 것일까. 그건 결코 아니다. 200년 전 만들어진 도자기 꽃병을 잘 보관해 보여주는 일은 박물관의 과제이지 극장의 과제가 아니다. 극장 무대가 객석보다 위에 있는 것은 관객에게 중요한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연출을 통해 연출가는 관객에게 무대 위 사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며, 무대와 객석 사이에 토론이 벌어지게 해야 한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시대에 따라 우리 삶의 형태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므로 과거의 오페라 작품을 동시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연출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는 정치적이고 오페라에 등장하는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돈과 권력을 좇느라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니벨룽의 반지’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랑이 불가능해진 이 사회에서 어떻게 다시 진정한 관계를 맺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오페라 연출가는 작품 속에서 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고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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