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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도, 두려움도 이젠 다 부질없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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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28면

자살이었다.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하는 날, 그 찬란한 날 동틀 무렵 한나 슈미츠는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그녀를 위해 새 출발을 준비하던 미하엘 베르크에게는 죽어서야 묻힐 수 있는 깊은 의혹이 가슴에 깊게 새겨진 순간이기도 하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35> 절망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 1944-)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법대 교수로 재작할 때 추리소설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젤프의 살인』을 발표하여 독일 추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화 ‘더 리더’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책 읽어주는 남자』(1995)는 독일 문학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으며, 독일의 한스 팔라다 상과 디 벨트 문학상, 이탈리아의 그린차네 카부르 상, 프랑스의 로르 바타이옹 상, 일본의 마이니치신문 특별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 ‘더 리더’의 원작으로 유명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1995년)는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 어느 남자와 연상의 여자 사이에 벌어진 애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는 무슨 일로 자살했던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 말 독일의 어느 도시. 황달에 걸려 허약해진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이 우연히 서른여섯 살 여자 한나를 만난다. 성숙한 여인의 농익은 성적 매력 앞에서 미하엘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미하엘에게 여자를 가르쳐 주었던 한나는 소년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 그로부터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성 사이의 사랑은 묘하게 전개된다. 책 읽어주기, 샤워하기,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은 이렇게 반복적인 패턴으로 진행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그의 곁에서 사라진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9년이 지나서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재판장에서였다.

스물한 살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학회 활동의 일환으로 법정을 방문했다가 한나가 피고인으로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미하엘은 과거에 몰랐던 한나의 결정적인 비밀을 알게 된다. 그녀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나로서는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유대인 수용소 학살과 관련된 보고서를 자신이 썼다는 누명을 쓰고도 약점이 들통날까 봐 함구했을 정도였다.

물론 문맹인 그녀가 보고서를 썼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녀는 필적 감정을 받아야만 했다. 한나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과도한 형량을 선택한 그녀가 측은했던지, 미하엘은 10년 동안 감옥에 갇힌 그녀에게 카세트테이프를 보낸다. 직접 책을 읽고 녹음한 것이다. 그녀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니면 소년 시절 자신의 사랑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어쨌든 미하엘은 계속 한나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물론 그녀의 비밀을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비밀스러운 관계가 지속된 지 4년째, 미하엘은 어린아이 같은 필적으로 쓰인 한나의 편지를 받는다.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

그녀가 그 고통스러운 문맹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기는커녕 계속 녹음 테이프만을 보냈다. 미하엘은 몰랐지만, 여기서 한나는 법정에서도 느끼지 않았던 깊은 절망을 맛보게 된다.

“절망(desperatio)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스피노자의 『에티카』 중)

두려운 결과가 예측될 때가 있다.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운 결과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이 두려운 결과에 직면할 때, 절망은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우리의 목을 조인다. 이것이 바로 한나가 느꼈던 절망의 실체다.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극도로 두려웠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문맹에서 벗어나려고 절치부심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자신이 결코 문맹이 아니었다는 것을 포장하기 위해 미하엘에게 짧은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하엘은 그녀에게 답신을 하지 않고 녹음 테이프만 계속 보내면서 그녀의 마음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문맹이라는 것이 폭로되지나 않을까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보다 더 큰 절망이 그녀에게 찾아온 것이다. 미하엘이 자신의 비밀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가 모두 공개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미하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한나가 자살한 뒤 찾아간 교도소에서 담당자는 미하엘에게 말한다. “그녀는 당신이 편지를 써 주기를 정말로 고대했어요. 그녀는 오직 당신에게서만 우편물을 받았어요. 우편물을 나누어 줄 때면, 그녀는 ‘나한테 온 편지는 없어요?’라고 물었지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 소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그렇다. 미하엘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더라면 한나는 자신을 자살로 몰고 간 절망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녀에게 자신이 문맹이었던 어두운 수치심을 영원히 덮어 주었을 테니까 말이다.



강신주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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