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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지구의 운명, 답은 물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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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물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온 가장 큰 요인이다. 당대 사회가 기술과 조직을 동원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시대의 운명이 갈렸다. 20세기 다목적 댐의 시대를 연 미국 후버댐. 1936년 완공됐다. [사진 민음사]

물의 세계사
스티븐 솔로몬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민음사, 704쪽, 2만8000원

1987년 독일로 유학 갔을 때, 물을 사먹는 걸 보고 놀랐다. 선진국인데 수돗물조차 그냥 마실 수 없다니. 사 마셔야 하는 물값이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도 그렇게 변했다. 물도 상품으로 팔리는 것이 한국경제의 성장을 보여주는 징표인가, 아니면 그만큼 환경이 오염됐다는 걸 알리는 신호인가.

 700쪽에 달하는 『물의 세계사』의 테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물 투쟁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위스키는 마시기 위해 있다면, 물은 싸우기 위해 있었다”고 말했다. 한 문명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은 결국 물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고 주장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인간과 물의 관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1914년 8월 파나마 운하를 항해하는 최초의 증기선(사진 위).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사진 아래). [사진 민음사]

 첫째, 인류 문명은 물에 대항하는(against) 역사로 시작됐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강에서 발생한 것처럼 관개농업으로부터 문명이 탄생했다. 재난을 야기하는 물을 다스리는 것을 수단으로 하여 이집트와 중국에서 전제 군주정이 출현했다. 태초부터 정치는 치수(治水)라는 패러다임이 성립했다.

 둘째, 물과 함께(with) 하는 것으로 문명은 성장했다. 인류는 물 다스리기를 넘어 이용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으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치수가 물을 가두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운하는 물의 길을 만들어서 흐르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전자가 농업을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인력과 물자를 유통시키는 상업이 주목적이다.

 물로 흥하다가 물로 망한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7세기 초 북쪽의 황허강과 남쪽의 양쯔강을 운하로 연결하여 지리적으로 상이한 두 구역의 자연자원과 인적자원 이용에 시너지 효과를 냄으로써 급성장했다. 하지만 중국은 대운하 덕분에 가능했던 자족적 경제로 고립을 선택했고, 이 때문에 정체됨으로써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급속히 쇠락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생겨났다.

 반면 유럽은 전체를 통합하는 내륙 수상 수송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작은 국가 단위가 만들어졌고, 이런 체제가 완성되면서 통제받지 않은 교역과 자유시장 기업들이 성장했다. 이 같은 차이가 ‘나비효과’로 낳은 것이 15세기 지리상 발견과 대서양시대 개막이다. 근대는 내륙의 수로가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서 글로벌 교역망이 열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근대화를 추진하는 엔진인 산업혁명도 증기기관이라는 물을 토대로 한 에너지의 발명으로 이룩됐다.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한 강대국은 영국과 미국이다. 먼저 팍스 브리타니카의 정점에 1869년 완공된 수에즈 운하가 있다. 이 운하를 통해 영제국은 지중해와 홍해 그리고 인도양을 연결하여 세계 무역의 4분의 1, 산업 생산량의 30%를 점했다. 1914년 파나마 운하 건설은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간다는 신호였다. “파나마 지협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됐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과 동아시아 지역을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된 세계 규모의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했다.”(379쪽)

 ‘물과 함께’ 하는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은 20세기에 바뀌기 시작했다. 환경의 지배를 받다가 환경을 지배하는 존재로 인류의 위상이 변하면서, 인간이 더 이상 물과 함께하지 않고 물을 지배하고자 할 때 물의 복수는 시작됐다. 생태계 파괴가 인류 생존의 문제로 대두하면서 물은 무한한 자연자원이 아니라 미래의 인류와 함께 써야 할 공동자산임을 깨달았다.

 셋째, 21세기에서 인류는 지속가능한 성장과 생태계 균형을 위해 ‘물을 위하여(for)’로 문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과제에 직면했다. 앞으로 세계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물 투쟁을 벌일 전망이라면, 물의 도전에 대한 응전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요컨대 지구는 우리 몸과 마찬가지로 70%가 물이기 때문에,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며 “우리는 결국 물이다”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개별 역사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말처럼, 이미 알려진 물의 역사들의 집합으로 서술된 이 책 전체는 물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단지 문제는 모든 역사문제를 물로 환원하는 물 결정론이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물이라는 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응전이다.

 끝으로 이 책이 한국사에 주는 의미는 뭘까. 이 책이 다루는 지난 5천 년간 물의 역사를 한국인들은 지난 50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치수로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까지는 ‘물에 대항해서’ 그리고 ‘물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었다. 아직 섣부른 판단인지 모르지만, 이 대통령이 구상한 한반도 대운하의 문제점은 ‘물을 위하여’로 패러다임 전환이 요청되는 시대의 도전에 대한 응전을 잘못했다는 점이다. 이제 바통은 박근혜 정부에게 넘겨졌다. 창조경제가 ‘물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김기봉 경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현재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장으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팩션시대: 역사와 영화를 중매하다』 『역사들이 속삭인다』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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