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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상징' 다이먼마저 … 저무는 금융황제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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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일요일(5일)이었다. 미국·유럽의 주요 펀드매니저들에게 긴급 의견서가 전달됐다. 미국 거대 금융그룹 JP모건의 ‘주총 안건 분석보고서’였다.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가 작성한 것이었다. ISS는 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에게 주총에서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지를 조언하는 회사다. 서방 경영자들에겐 ‘펀드의 CP(지휘본부)’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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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S는 “올해 주총(이달 21일)에선 JP모건 경영진이 제시한 이사 후보 중 3명을 거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제이미 다이먼(57)이 겸직하고 있는 “회장과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분리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틀 뒤인 7일엔 또 다른 보고서가 배포됐다. 이번엔 ISS와 쌍벽을 이루는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였다. 이 회사는 “다이먼이 올린 이사 선임 안건들을 대부분 부결 처리하고, 회장과 CEO 자리도 분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포브스는 “다이먼에 대한 반란이 시작됐다”고 8일 전했다. 정치·경영 전문 온라인 매체인 슬레이트는 “다이먼의 몰락”이라고 못 박았다.

 다이먼은 월가의 아이콘이다. 그의 지휘 아래 JP모건이 2008년 금융위기를 돌파하며 더욱 강해졌다. 그는 탐욕으로 찌든 다른 금융인과는 달리 깨끗한 이미지였다. 그가 월가를 규제하려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다.

 이런 다이먼이 주주들의 심판 대상으로 전락했다. 화근은 지난해 터진 신용파생상품 스캔들이었다. 그해 JP모건 런던법인 투자책임자인 브롱코 익실이 신용파생상품을 대량으로 매매했다. 금융판에서 지나친 베팅은 비극의 씨앗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려 62억 달러(약 6조8000억원)를 까먹었다. 불똥이 곧바로 다이먼에게 튀었다. 그의 조직 장악력과 리스크 관리능력에 의문이 제기됐다. 예금보험공사 등 미국 금융감독 당국 8곳이 다이먼과 JP모건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불법행위가 줄줄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JP모건이 캘리포니아 등의 전력시장을 조작해 이익을 본 혐의가 지난주 드러났다.

 미국 금융전문지인 아메리칸뱅커스는 “이제 펀드 등 주요 주주들이 금융황제 시스템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금융황제는 다이먼과 같은 거대 금융그룹 경영자를 말한다. 한 사람이 은행·증권·보험 등 모든 금융 부문을 거느린 금융그룹(금융 수퍼마켓)을 지휘해서다. 지난해 말 현재 다이먼 휘하엔 자산 2조5000억 달러(약 2700조원)와 임직원 25만 명이 있다.

 금융황제는 1998년 씨티그룹 탄생과 함께 등장했다. 당시 샌디 웨일이 회장 겸 CEO를 겸직하며 전권을 휘둘렀다. 근대 금융 역사상 모든 금융 부문을 쥐락펴락한 인물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후 금융회사들이 인수합병 을 공격적으로 벌이면서 황제들이 여럿 탄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켄 루이스, 2008년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리처드 풀드 등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불명예 퇴진했다.

 미 금융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사람이 거대 금융그룹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파악하고 관리하기란 불가능하다”며 “지난해까지 씨티그룹 등에서 온갖 스캔들이 잇따라 터진 이유”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주들은 문제가 불거지면 금융황제를 갈아치우는 데 치중했다. 한 사람이 회장(이사회 의장)과 CEO 자리를 모두 차지하는 시스템에 대해선 의문을 품지 않았다. 고든은 “주주들이 뛰어난 전략가이면서 관리자인 인물이 존재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주총까지만 해도 다이먼이 그런 믿음에 부합하는 인물로 비쳤다.

 그러나 올해엔 사정이 다르다. 주주들이 JP모건의 회장과 CEO를 분리할 태세다. 이미 씨티그룹과 BOA가 지난해 두 자리를 분리했다. 주요 금융그룹 가운데 JP모건의 다이먼과 골드먼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만 회장과 CEO를 겸직하고 있다.

 다이먼이 21일 주총에서 자리 하나를 내놓게 되면 블랭크페인만 남는다. 그도 요즘 주주들의 비판 대상이다. 금융황제 시대가 98년 이후 15년 만에 저무는 셈이다.

강남규 기자

◆ 금융 수퍼마켓

온갖 금융상품을 원스톱 서비스할 수 있는 금융그룹. 씨티은행과 보험회사인 트래블러스가 1998년 합병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미국·유럽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대세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몸집을 줄이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한 사람이 회장과 최고경영자(CEO)를 동시에 맡는 방식(금융황제 시스템)도 개혁 대상으로 도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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