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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중= 오세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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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기중은 즐겁기만 합니다. 엄마 아빠 누렁이 그리고 분이만 마저 만들면 온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이 얼굴은 왠지, 아무리 앨써 만들어도 마음에 안 듭니다.
몇 번씩이나 다시 만들었다가는 부수고 또다시 만들곤 합니다.
흙이 온통 묻었지만 아기중온 미처 박보살님의 꾸중같은 것은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아기중은 땀을 빨빨 흘리면서 열심히 진흙덩이를 다듬고 있습니다.
『이젠 그만 돌아가야지. 아가야, 손님들이 많이 와서 기다릴라.』
흙으로 만든 엄마가 옆에서 근심스럽게 소근거렸지만 아기중은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오늘은 꼭 분이 얼굴을 만들고야 만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분이는 재너머 판잣집동네에 사는 송서방 딸입니다. 나이는 아기중과 같이 일곱 살 이지만 제법 어른스럽게 얌전을 빼는 새침동이입니다.
송서방이 절에 품팔이 일을 때는 언제나 분이와 누렁이를 함께 데리고 옵니다. 누렁이는 분이네가 기르는 잡종개 입니다. 몸집은 분이 보다도 더 크지만 참 순한 개입니다.
분이도 아기 중처럼 엄마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 일이 끝나면 업고서 집에 돌아가 줄 부러운 아빠가 있습니다. 또 항상 옆에 붙어다니며 동무해주는 누렁이가 있습니다.
아기중은 분이 아빠가 분이를 등에 업고서 집에 돌아가는 볼 때마다 눈물이 글썽해지며 아빠 엄마를 그려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쥐어짜 생각을 해봐도 엄마 아파 얼굴은 짐작도 안 갑니다. 언젠가 절에서 일하는 좀 수다스러운 식모아줌마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강보에 싸서 뉘집 대문간에 버린 갓난아기를 이 절 주지인 박보살님이 주워다가 기른 것이 오늘의 아기중이라고 했습니다.
『얘야, 이젠 그만 돌아가 보라니까. 그러다가 또 박보살님한테 혼날려구…』
부처님을 닮은 아빠도 한마디 거듭니다. 아기중은 점점 초조해 집니다.
-보조개를 파며 소리 없이 웃는 분이의 예쁜 미소, 파리하고 갸름한 얼굴, 관세음보살님처럼 귓밥이 콘 탐스러운 귀, 뚫어지게 쏘아보는 커다랗고 맑은 눈….
아기중은 문득 분이가 보고싶어 집니다. 그러나 분이는 다시는 절에 안 올지도 모릅니다. 절 일이 모두 끝났기 때문에 송서방은 절에 볼 일이 없어 졌습니다.
아기중은 분이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건 안됩니다. 박보살님이 알았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잡인들과 상대를 하면 부정 탄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는 박보살님이 무서워 집니다.
『너 은석아, 다시는 흙장난 말랬는데 왜 말 안 듣지? 또 혼좀 날래!』
언제 왔는지 파랗게 날이선 박보살님의 불같은 호령이 쨍-하고 귀청을 쨉니다. 아기중은 고양이에게 쫓긴 취처럼 오들오들 떱니다.
박보살님이 예까지 찾아오기는 첨입니다. 아마 단단히 화가나신 모양입니다.
『…글쎄 요꼴이 뭐냐, 이게, 오늘 새로 길아입은 이 옷 꼴 좀 보란 말이다 ! 』
박보살님은 손수 옷을 빗기고 목욕을 시킵니다.
아기중은 싫었기만 할 수 없습니다.
목욕하고 화장하고 새 옷 갈아입고 그리고는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법당으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법당에는 벌써 많은 아낙네들이 몰러와서 법석이고 있었습니다.
하얗게 분을 바른 아기중이 나타나자 법당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집니다.
박보살님은 조금전과는 전연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소리조차 사근사근, 사뭇 사탕을 녹입니다.
아기중은 박보살님에게 정중히 인도되어 부처님 앞으로 갔습니다. 법당 한 가운대에 마련된 미륵님 자리에 앉기 위해서 입니다.
아기중은 미륵님이 무엇인지 무엇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 합니다.
그러나 박보살님을 비롯해서 절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아기중을「애기부처님」이니「미륵님」이니 하고 부르며 온갖 소원을 들어달라고 빕니다. 아기중은, 그 소원들 이라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박보살님이 일러준대로 척척 처방을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아기중은 매일저녁 박보살님에게 매를 맞아 가면서 외워 익힌 것들을 그대로 옮겨줬을 뿐인데 아낙네들은 어쩌면 저렇게 신통히도 딱딱 맞춘다면서 귀한 돈을 아끼지 않고 듬뿍듬뿍 내놓는 것입니다.
아기중은 백우선(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으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 정중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연초록색 장삼(중이 입는 두루마기)에 붉은 띠 노란두건(머리에 쓰는 모자 같은 것)을 쓰고 백우선을 든 자태는 과연 하늘에서 방금 내려와 앉으신「미륵님」같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합장 배례하며 염불을 외기 시작합니다.
아기중은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독한 향연기가 코로 들어와서 기침이 나오려고 합니다. 아기중은 얼른 눈을 떠서 박보살님의 눈치를 살펴 봅니다.
박보살님의 눈이 파랗게 날이 서 있습니다. 염불을 외면서도 계속 감시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기중은 꼴깍 침을 삼키면서 겨우 기침을 참았습니다.
미륵님은 기침이나 재채기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박보살님은 항상 경읽 듯 일러줍니다.
아기중은 다시 눈을 꽉 감았습니다.
눈을 감은 채 분이 얼굴을 그려봅니다.
-새침한 분이얼굴이 다가옵니다.
아기중이 손을 내밀어 잡으려고 하자, 금방 저만큼 도망치며 방그레 웃어줍니다. 관세음보살님처럼 황홀한 미소로 아기중의 간장을 녹입니다. 새하얀 이쁜 손이 나불거리며 아기중을 손짓해 부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저것은 밤마다 꿈속에 그리워하는 엄마가 아니겠습니까……. 아기중은 기뻤습니다. 와락 엄마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엄마야 !』그러나 거긴 그리워 목메어 부르는 엄마는 없었습니다. 와룽- 하고 울리는 법당안 메아리가 깜짝 놀라게 했고, 놀란 사람들의 번득이는 눈초리가 일제히 쏠려왔고 무서운 박보살님의 차디찬 얼굴이 아기중을 꼼짝못하게 지키고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보살님은 꾀가 많고 능숙한 여자입니다.
『자, 모두들 관음경을 외웁시다. 지금 막 관세음보살님이 현현(실제로 나타나서 계시하는것) 하신 것을 우리 미륵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자 모두를 관세음보실님을 향하여 합장배례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박보살님은 더욱 요란하게 목탁을 두드리며, 관음경을 소리높이 외우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더욱 숙연해져서 염불을 따라합니다. 아기중은 자꾸 마음이 불안해 집니다. 어서 염불이 끝났으면 하고 조바심을 하지만 염불소리는 점점 더 가락을 높일 뿐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아기중은 슬펐습니다. 그리고 외로왔습니다. 조바심이 나도록 엄마가 그리워졌습니다. 아기중은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박보살님이 염불에 정선이 없는 틈을 타서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법당을 빠져 나왔습니다.
아기중은 살살 눈치를 살피며 다람쥐처럼 뒷산으로 기어올라갔습니다.
분이네 집엘 가려면 개울을 따라 가야 빠르지만 들킬까봐 겁이 났습니다. 아기중은 한번도 분이네 집엘 가보지는 않았지만 분이한테 들어서 모두 환합니다. -골목이 어떻게 생기고 어느 골목에서 몇 째 집이며 집모양이 어떻다는 것도….
아기중은 장삼자락을 팔락거리면서 뛰어갑니다. 초가을 바람이 제법 시원했지만 이마에선 땀이 샘솟듯 철철 홀러 내립니다. 분바른 얼굴이 땀과 먼지로 온통 얼룩졌습니다.
분이네 집은 분이가 말한대로 찾기 쉬었습니다. 셋째골목 맨 마지막 집이 바로 분이네 오막집이었습니다.
이러나 분이는 집에 없었습니다. 누렁이도 없였습니다. 집은 모두 꼭꼭 잠긴 채 텅 비어 있습니다.
아기중은 맥이 탁 풀렸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와-아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더러 어른들도 기웃거리며 신기한 듯 빙글거립니다.
아기중은 더 지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문지르며 오던 길을 되짚어 달렸습니다.
아기중은 아이들이 미웠습니다. 짓굿게 따라오며 놀려대는 아이들이 때려주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빙글거리는 어른들도 미웠습니다. 모두모두 미웠습니다.
아기중은 왕-하고 소리쳐 울고싶었지만 종래 울지는 않았습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음을 참으며 달음질 쳤습니다. 분이네 집이 이렇게 멀 줄은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올때는 근방인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멀어 졌을까요….
아기중이 절뒷산까지 겨우 허위허위 기어올라 왔을 때는, 벌써 해님은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며 서산마루에 댕그마니 올라앉아 있였읍니다.
아기중은 빨갛게 익은 노을 바라보며 쿨적쿨적 웁니다. 울수록 서러움은 자꾸자꾸 복받쳐 오릅니다.
땅거미가 어슬어슬 깔릴 때쯤 아기중은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집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분이와 놀던 소꿉놀이터로 갔습니다.
놀이터는 벌써 컴컴하게 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중에게는 모든 것이 환하게다 보입니다.
-이건 아빠, 이건 엄마, 이전 누렁이, 이건 분이….
그런데, 분이는 한 쪽 눈을 감고있습니다.
-참, 아침에 만들다가 말았었지! 아기중은 조그만 고사리손으로 분이 얼굴을 쓰다듬어 줍니다. 진흙은 습기를 머금어 끈적끈적 합니다.
-분이는 지금쯤 집에 돌아왔을까?
내가 찾아갔던걸 알까? …
아기중은 분이가 못 견디게 보고싶어 집니다.
『분아! 분이야!』어둠 속에서 메아리가 우렁우렁 하고 튀어나옵니다.
아기중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봅니다. 어둠이 휘휘 감겨옵니다.
『엄마야 !…』그러나 점점 더 무섭기만 합니다.
아기중은 미웠습니다. 자기혼자 외릅게 버려둔 엄마가, 아빠가, 미웠습니다.
아기중은 힘껏 주먹을 지고 내 갈겼습니다. 엄마가 픽 쓰러집니다. 또 갈겼습니다. 퍼석하고 아빠도 쓰러집니다. 발길로 힘껏 내 질렀습니다. 누렁이가 딩굴딩굴 굴러갑니다. 또 한 번 주먹을 번쩍 처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차마 내려치지 못했습니다. 한 쪽 눈 마저 틔워주지 못한 분이를, 차마 부서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분아! 분이야-.』아기중은 와락 분이를 끌어안고 왕-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피로가 온몸을 연기처럼 파고듭니다. 맥이 숙 빠 나가고, 소르시 졸음이 밀려듭니다.
아기중은 엄마를 만났습니다. 환한 아름다운 꽃밭에서 입니다. 아빠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기중은 엄마품에 안겨서 막 때를 습니다. 왜 자기만 혼자 버려두어서 무섭게 했느냐고, 다시는 엄마품을 안 떠난다고, 얼굴을 비벼대며 가슴을 파고듭니다.
『아이그머니나! 요녀석이 누구 젖을 만져. 이, 이손 치우지못해?』식모 아줌마는 질겁을 하며 아기중의 손을 뿌리칩니다.
그러나, 아기중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큼직한 식모아줌마 품에 안 긴채 행복한 꿈나라를 헤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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