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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 오른 어린이집 교사 "살려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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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저희는 이제 영원히 취업 못한대요. 원장들한테 명단이 돌려졌대요. 우리를 살려주세요.” 지난 7일 오전 어린이집 비리를 수사 중인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팀 관계자 앞으로 문자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정말 이런 경우가 말이 됩니까. 나쁜 놈들이 누구인데 우리가 찍히냐고요.” 하소연을 담은 내용이 이어졌다.

 문자를 보낸 이는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2년6개월가량 근무했던 전직 보육교사 송미영(32·가명)씨였다. 그는 어린이집 비리를 제보했다는 원장의 의심을 받다 지난 3월 쫓겨났다. 송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원장은 내가 외부에다 어린이집 비리를 떠들고 다녔다고 생각했다”며 “원장이 매일같이 불러 닦달해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송씨의 불행은 그가 일하던 어린이집이 올 초 서울시 보육담당 공무원들로부터 불시 점검을 받은 직후부터 시작됐다. 점검 나온 공무원들이 원장에게 보육교사들에게서 민원이 접수됐다는 뉘앙스의 얘기를 공공연히 했다는 것이다. 원장은 송씨를 제보자로 지목해 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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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육교사 살생부 확인=소문으로만 돌던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일명 살생부)가 사실로 확인됐다. 취재팀이 지난 한 달여 동안 만난 전·현직 보육교사들은 하나같이 “이 바닥에서 밉보이면 영원히 퇴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어린이집에 근무하다 쫓겨난 한 전직 보육교사는 "백수 생활을 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며 “보육교사를 구하는 어린이집 서너 군데에 면접을 봤는데 결국 취업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면접을 본 곳마다 원장들이 처음엔 채용을 할 듯하다가 이력서를 살펴본 뒤에는 특별한 설명 없이 거절 의사를 보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함께 일했던 보육교사로부터 자신의 이름과 주민번호, 경력 등 개인정보가 관내 어린이집 원장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블랙리스트라는 게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아무리 개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이라지만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면 도를 넘은 횡포 아니냐”고 말했다.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지자체별로 조직된 원장들의 이익단체인 민간어린이집연합회 등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킨 보육교사들의 개인 신상 정보가 담긴 리스트가 암암리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강동구의 한 어린이집 원장 L씨는 "비리니 뭐니 하면서 밖에 떠들고 다니는 골치 아픈 교사들을 채용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며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 서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집 원장과 비정규직 신분인 보육교사들 사이에도 철저한 ‘갑을의 법칙’이 존재하는 셈이다.

 ◆원장들 편에 선 일부 구의원=7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어린이회관에는 관내 민간어린이집연합회 임원 50여 명이 모였다. 어린이집 불법 운영과 관련해 경찰 수사와 본지 보도(6일자 1·4·5면, 7일자 1·3면)가 이어지자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참석자 중에는 전직 연합회 회장이자 현직 구의원인 A씨도 있었다. 어린이집 5곳을 운영하는 A씨는 현재 2억원대의 공금을 빼돌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역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다른 원장들도 다수 참석했다. 일부 강경파 원장들은 “범죄집단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보육 거부 선언을 하든지 어린이집 인가증을 반납하든지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원장 K씨는 “일부 격앙된 주장도 있었지만 어린이집을 너무 매도하는 쪽으로 여론이 흐르고 있어 다양한 의견을 나눈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2월 송파구청과 송파경찰서가 일제 합동 점검과 수사에 착수한 직후에는 일부 구의원들이 구청을 상대로 “어린이집을 범죄의 소굴로 취급하는 건 심하지 않으냐”며 “구청이 과잉 조사를 계속하면 예산 협조가 어려울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고 구청 관계자가 전했다. 어린이집 불법 운영에 대해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구의원들이 표를 의식해 원장들을 대변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탐사팀=고성표·김혜미 기자

[어린이집 블랙리스트 반론보도문]

본지는 지난 5월 9일자 '살생부 오른 어린이집 교사 "살려달라"' 제목의 기사 및 사설에서 "소문으로만 돌던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일명 살생부)가 사실로 확인됐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어린이집 민간분과위원회는 "서울어린이집 민간연합회에서는 문제의 보육교사들의 명단(살생부)을 작성해 유포한 적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내용은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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