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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58) 10·26사태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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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9년 10월 26일 오전 11시 충남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 둘째)이 삽교천 방조제의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왼쪽부터 이규홍 농업진흥공사 사장, 박 대통령,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 손수익 충남도지사. 그날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 사태가 벌어졌다. [중앙포토]

1979년 10월 26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행사를 마치고 오찬장이 있는 충남 도고온천의 한 호텔로 이동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 3대 중 1대가 고장을 일으켜 뜨지 못했다. 경호원 가운데 일부는 차로 이동해야 했다.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다.

 그 시간 나는 청와대 사무실에 있었다. 서석준 청와대 경제 제1수석이 삽교천 행사에 따라갔다. 경제 담당이 아니었던 나는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늦은 오후 박 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다. 대통령이 지방 순시를 갔다가 건의 사항을 들으면 행정을 담당하는 정무 제2수석인 나에게 바로 지원 대책을 지시했다. 수행하지 않을 때는 대개 전화로 지시를 받았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있을지 몰라 나는 사무실에 앉아 전화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났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본관으로 올라가봤다. 의전실에 당직인 정기옥 비서관이 있었다. 정 비서관에게 물었다.

 “대통령은 어디에 계신지….”

 “지금 샤워 중이실 겁니다.”

 ‘오늘은 지시 사항이 없겠구나’ 싶었다. 본관을 걸어서 나왔다. 굽어진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모퉁이에 키 큰 백합나무가 보였다. 그때 갑자기 나무 위로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깍, 깍, 깍.”

 까치 우는 소리에 나무 위를 쳐다봤다. 까치떼가 싸우고 있었다. 창덕궁과 청와대 숲 사이에서 벌어지는 까치떼 싸움은 많이 봤는데 청와대 본관 앞에선 처음이었다. 15~16마리의 까치가 두 무리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은 불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수석 사무실이 있는 청와대 신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사무실로 가서 서둘러 잔무를 정리했다. 서울 효자동 근처 한식집 ‘유선’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인 저녁 7시를 훨씬 넘겼다. 서둘러 서류 가방을 싸들고 승용차에 탔다.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유선의 김선영 사장이 다가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서 금방 이상한 총소리가 났어요. 못 들으셨어요?”

 “아니요. 지금 제가 그 쪽에서 오는 길인데….”

 총소리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음식점 방 안으로 들어가니 광주에서 온 반가운 손님들이 나를 맞았다. 박윤종 도정자문위원장, 김기운 백제약품 회장, 이을호 전남대 교수였다. 즐겁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막 홍어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려는데 내 차를 운전하는 신판근 기사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차내 자동경비전화로 청와대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비상소집령이 내렸다고 합니다.”

 들었던 수저를 내팽개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10분도 채 안 걸려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 비상소집령을 받은 사람 중에 내가 제일 가까운 장소에 있었나 보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본관 현관 앞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김계원 비서실장이 서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수석들 다 모일 때까지 일단 기다리세요.”

 어떤 일로 비상소집령을 내렸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더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다. 일단 나는 본관 현관 안쪽에 있는 의전실 옆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이재전 경호실 차장이 현관에 도착했다. 김 실장은 이 차장을 기다리느라 현관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재전 경호실 차장. 두 사람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2층 비서실장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서너 걸음 떨어진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다 오를 때쯤 이재전 차장이 놀란 목소리로 던진 한 마디가 내 귀에 꽂혔다.

 “그러면 친위쿠(측근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를 뜻하는 친위 쿠데타의 준말)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그때는 정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후 사건을 재구성해보니 김 실장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병력 충돌을 막기 위해 이 차장을 불러 얘기한 것 같았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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