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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의 세상탐사] 트로이 목마 vs 황금알 거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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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길이었다. 10년 동거 기간에 수많은 고비와 위기를 겪었다. 다툼 끝에 허겁지겁 등을 돌리고 떠나는 모양새다. ‘잠정 폐쇄’에 이른 개성공단을 남녀관계에 빗댄 얘기다.
 
개성공단은 처음부터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김대중(DJ)정부 시절 맞선을 보고 노무현정부 때 살림을 차렸다. 그사이 북쪽도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양측의 속셈은 너무 달랐다. 남측은 시장경제, 체제 홍보, 중소기업 활로 등을 염두에 뒀다.

반면 북측 입장에선 달러 박스를 챙기면서 대북 경계심리 완화, 외국자본 유치 효과쯤을 기대했을 거다. 남측이 ‘트로이의 목마’라고 착각했다면 북측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오산했다. 김대중·노무현정부의 핵심들은 당시 “서부전선이 북상해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 것만 따져도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정일 쪽도 “만에 하나 공단이 폐쇄돼도 3년이면 기술을 다 배워 공단을 접수할 수 있다”는 설득 논리로 내부 동요를 다독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뒤 남과 북의 교묘한 동거는 막을 내렸다. 김정은은 젊은 혈기탓인지 단도직입으로 나왔다. ‘우리 땅 우리 인민’을 내놓은 대가로 고작 연 9000만 달러(약 1000억원)의 저임금을 따먹는 데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우리 언론이 ‘초코파이 효과’ 운운한 것은 역린을 거스른 모욕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8일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가 “북한 근로자 전원을 철수한다”는 담화를 발표한 배경에는 젊은 지도자의 압박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양건이 누군가? 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 밤늦게 그의 사무실로 직통전화를 걸어도 한 번도 전화를 놓치지 않았다는 인물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화와 도발이란 두 개의 칼날로 대남 정책을 요리해 왔다. 그날 TV에 비친 표정에는 아쉬움과 원망, 회한이 교차했다. 김정은이 ‘노련한 여우’ 김양건에게 권한을 줘 반전을 꾀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으리라.
 
개성공단 잠정 폐쇄가 양측에 남긴 후유증도 크다. 우리 정부·기업이 투자해 놓은 1조원 넘는 돈도 그렇거니와 연간 생산액 4억7000만 달러, 노동자 5만3000여 명이라는 숫자는 남측 기업인과 북측 주민의 고통지수를 압축해 준다. 우리가 기업 피해(정부는 1조원, 기업들은 10조원 주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북측 역시 일감이 없어진 근로자들의 사후 대책에 골머리를 앓을 거다. 대북 투자 리스크 때문에 향후 경제재건을 위한 해외자본 유치에도 큰 타격을 받을 게 뻔하다.
 
그래서 개성공단은 금강산관광과 달리 지금이라도 되살아날 소지가 많다. ‘동거’의 아픔 못지않게 기쁨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남북이 냉정한 실사구시 마인드를 되찾아야 한다. 차제에 개성공단과 관련한 원칙을 확고히 한다면 거꾸로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먼저 정경(政經)분리 원칙이다. 남과 북 모두에 적용될 얘기다. 어떤 돌발사태가 터지든 개성공단은 경제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게 바람직하다. 개성공단이 체제 홍보, 자존심 과시의 각축장이 돼선 곤란하다. 근로자 철수, 공단 폐쇄, 인질화 같은 사태가 재발할 경우 그땐 미련 없이 포기한다는 결심을 갖는 게 마땅하다. 제3국 기업들을 입주시켜 국제공업도시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기업 차원에서 짚을 부분도 있다. 북측은 2012년 11월 공단 입주업체가 가격 조작을 통한 탈세행위를 할 경우 ‘200배 벌금’을 매기겠다는 무지막지한 규정(세금규정 시행세칙)을 만들었다.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북측은 몇 차례나 ‘임가공 업체들이 손실을 내는 게 사업 구조상 말이 되느냐”며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한 업체 관계자는 “기계설비 감가상각이나 부품가격 책정, 대여금 이자 등 이른바 이전가격을 통해 실제 이익을 줄이는 사례도 꽤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낼 세금은 내겠다’는 전향적 자세가 없을 경우 개성공단은 또 다른 암초에 부닥칠 수 있다. 김정은 제1비서는 지난해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식(4월 15일)에서 ‘다시는 인민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개성공단 모델이야말로 그런 다짐을 실천할 지름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나이로든 실력으로든 자식뻘 되는 김정은 체제를 아량으로 보듬는 자세를 보여줄 때다. 개성공단의 진정한 주인은 기업과 노동자다. 거기에서 갈등을 뛰어 넘는 소(小)통일이 시작된다.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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