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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단 사건」 첫공판 | 사실 심리 내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9일 하오 2시부터 속개된 1회 하오 공판은 정 하룡(34·경희대 조교수·정치학박사) 이 순자(37·정 하룡의 처·국회 도서관 서기관) 조 영수 (34·외국어대강사·정치학박사) 김 옥희(30·조 영수의 처· 청와대경호실장 부속실 통신원) 등 네 피고인에 대한 검찰측의 직접신문을 끝냈다.
다음 공판은 11일 상오 10시 속개된다.
▲정 하룡 = 63년 5월과 65년 9월 두 차례 동백림을 통해 평양에 갔다(처 이 순자 피고인과 동행), 그곳에서 3주일 동안 지하당 조직 ·난수표 해독 방법 등 밀봉교육을 받았다. 평양에서 북괴의 대남공작간부 이 여순을 만나 처와 함께 노동당에 입당했다. 흥남질소비료 공장등을 구경하고 귀국할 때 공작금 1천 「달러」를 받았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확대경 「다이아먼드」「트랜지스터」등을 샀지만 그것은 암호 해독이나 A3 방송만을 듣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귀국 후 조 영수와 만났고 조가 지난 2월 「파리」로 떠날 때 A3 방송 연락이 잘 안돼서 노 봉유(「파리」유학생)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국내에 와서는 이밖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 순자 = 남편과 함께 두차례 평양에 다녀왔다. 동백림에서는 『혁명가의 아내는 용감해야 한다』는 격려를 받았다. 평양에 가서는 3주일동안 A3 청취방법 난수표 해독 방법 등을 남편이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 그 뒤 노동당에 입당했다. 귀국할 때 난수표는 몸에 지녀왔으며 직장인 국회도서관에 감추어 두었다. 평양에서 축소 「필름」제조 방법등을 교육받긴 했지만 당원으로서의 어떤 의무는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 조 영수 = 64년 3월과 65년 8월 두 차례 평양엘 다녀왔다. 두 번 다 처 김 옥희와 동행했다. 평양국제 「호텔」에 머무르면서 밀봉교육을 받고 흥남질소비료공장, 새정 등을 구경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처와 함께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들은 성대한 입당축ㄱ하 「파티」도 열어주었다. 「파리」유학중에 한비난으로 고생이 심했는데 같은 유학생이며 북괴공작원인 노 봉유를 통해 생활비를 받아 쓰다보니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국내사정이 그쪽에서 듣던것과는 너무나 틀려 간첩활동을 하지 못했다. 지난 2월부터 3개월 동안 「파리」「제네바」 등을 다녀왔는데 그때도 평양에 들러 왔었다는 공소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김 옥희 = 64년 3월 남편 조 영수가 신혼여행을 가자기에 「파리」에서 서백림까지 갔다. (당시 결혼 후 3개월) 다시 동백림에 가서 북괴 노동당 공작원 허민수와 남편이 만난 것을 봤다. 싫지만 남편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를 거쳐 형양에 갔다. 16일동안 머무르며 고향인 개성에도 들렀다. 「파리」로 돌아갈 때 평양 공항에서 남편이 공작금 2천「달러」를 받은 사실을 「체코」에 가서야 알았다.
두 번째로 65년 8월 다시 평양에 갔을때는 15일동안 그들이 준 선전책자등으로 이른바 교양을 받았다. 노동당에 입당하기 싫다니까 『남편이 시키는대로 하라』기에 반강제로 입당하고 말았다. 내가 귀국후 불어강사를 하겠다니까 그들은 진보적인 학생들을 포섭, 4·19와 같은 사태를 조성하라는 지령을 했다. 돌아올때는 북평과 만리장성을 구경했다. 66년 3월 7일 청와대에 취직, 미국 신문·잡지 가운데 한국과 월남관계기사를 번역해왔다. 청와대 출입하는 저명인사, 경호실 직원 동태, 대통령 행차 계획등을 남편에게 얘기한 일은 있지만 계획적인 정보제공이라기보다 부부만의 사담에 불과했다. 평양에 갔다온 일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북괴의 보복이 두려워 자수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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