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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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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검게 그을린 평범한 얼굴은 노동으로 단련된 듯 단단하다. 그림의 바탕이 된 누런 종이엔 ‘정부양곡’ ‘찐보리쌀’ 같은 글자가 찍혀 있다. 정부미 포대다. 평생 땅을 밟고 흙을 만지며 살아왔을 이 농민의 초상화는 흙빛 양곡부대에 그려졌다. 오른쪽에 한자와 한글을 섞어 세로로 내려쓴 손글씨는 사내의 호적초본이다. 출생·결혼 등 서민의 평범한 인생사가 건조하게 들어 있다.

 그림 속 인물은 화가의 아버지다. 그린 이는 이종구(58) 중앙대 교수. 그의 데뷔작 중 하나인 ‘연혁-아버지’(1984)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화가는 1980년대 형상미술 혹은 민중미술의 시대, 정부미 부대에 극사실주의적으로 아버지·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렸다. “내가 농부를 그리면서 미술재료인 캔버스나 고급 종이 대신 헌 쌀부대를 화폭으로 사용한 것은, 검게 그을린 노동하는 농부의 진솔한 초상을 화려한 재료에 함부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는 게 화가의 변. 그림 속 웃지 않는 남자는, 그리고 아버지를 그런 표정으로 그린 화가는 화가 나 있는 것도 같다. 값이 날로 떨어지고 있는 쌀처럼, 소처럼, 살아온 노고에 비해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말이다. 해서 그림 속 깊이 파인 눈은 슬퍼 보인다.

이종구, 연혁-아버지, 1984, 85×110㎝, 부대 종이에 아크릴릭.

 아버지는 밭고랑에 농사를 지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그렸다. 물감이 잘 먹어 들어가지도 않았을 부대 종이에 농사짓듯 한 획 한 획 붓질했다. 그래서 이 주름진 얼굴 그림엔, 그림의 가장 기본인 재현적 묘사를 위한 노동의 수고로움이 온전히 남았다. 부대 종이 속 농민의 얼굴로 이름난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제목의 ‘연혁’은 아버지의 연혁이자, 그의 연혁이다. 아버지는 곧 아들이 비롯한 곳이니까. 그러니 이 그림은 화가의 뿌리 찾기다. 이제 세상에 없는 화가의 아버지는 그림 속에 생생하게 남아서 20세기 대한민국 대표 아버지 초상이 됐다. 우리 모두가 농민의 자식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이 땅이든, 공장이든, 사무실이든, 거리든, 자기 일을 충실히 해내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이곳의 오늘을 이룬 ‘연혁’은 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양곡’이라는 그의 업을 암시하는 글자나, 태어난 때와 장소를 알려주는 공문서보다, 그의 고지식하고 단호해 보이는 얼굴이 더 정확한 그의 ‘연혁’이 됐다. 그것은 항상 그 모습으로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왔을 우리 아버지들의 연혁이다. 곧 어버이날이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