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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A4지 빼곡한 청구서 … 월급 720만 달러에 + α주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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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시 돈이었다. 개성공단에서 전원 철수하려 지난달 29일 짐을 챙기던 남한 측 관계자 50명을 붙들고 북한이 내놓은 건 A4용지에 빼곡히 기록한 청구서였다. 홍양호 개성공단관리위원장을 비롯한 7명이 남아 임금 지불과 세금 문제 등을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해 준 뒤에야 43명이 남한 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개성공단 폐쇄, 누구 손실이 더 클까=김양건 노동당 비서는 지난달 8일 북측 근로자 전원 철수 조치를 밝히며 “우리는 경제적으로 얻은 게 거의 없으며 오히려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은 남측”이라고 주장했다. 또 “군사 요충지(개성)를 (공단으로) 내준 건 막대한 양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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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 적잖은 이익을 보고 있다는 우리 측 판단에 대해 “(남측이) 그 무슨 돈줄이니 퍼주기니 하며 우리의 존엄까지 악랄하게 중상모독해 왔다”(국방위원회 성명)는 식으로 반응해 왔다. 하지만 결국 개성공단의 존폐가 달린 긴박한 순간 달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겉으로는 ‘김정일의 대남 시혜사업’으로 내세우지만 외화벌이가 절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간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 적지 않은 이득을 챙겼다.

 북한은 330만㎡(약 100만 평) 규모의 1단계 개성공단 부지조성 사업이 한창이던 2004년 모두 330만 달러(㎡당 1달러)의 토지 임대료를 챙겼다. 또 낡은 군부대 막사와 민가 등 ‘지장물’ 철거비를 따로 요구해 1300만 달러를 받아 갔다. 김연수 국방대 교수는 “북한 군부는 막대한 돈을 챙기면서 마치 군사지역을 내준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며 “탱크부대 등도 후방이 아닌 개성공단 측방에 재배치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123개 우리 업체에서 일하는 5만3000여 명의 북한근로자 임금(연간 9000만 달러)은 북한 경제에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 재래식 무기 수출로 북한이 한 해 벌어들이는 돈이 1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무시 못할 액수다. 그렇지만 북한 근로자들에게 월급(평균 134달러)은 ‘그림의 떡’이었다. 공단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김영실씨는 “출근한 날만큼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현금 인출은 어렵다”며 “통장에 함께 찍혀 나오는 배급표로 물건을 받은 뒤 시장에 내다팔아 돈을 마련하곤 했다”고 말했다.

 물론 개성공단에 9495억원의 시설투자(통일부 집계)를 해 연간 5500억원의 제품을 생산해 온 우리 기업들도 피해는 크다. 하지만 북한도 달러박스를 잃은 데다 근로자와 개성지역 민심 동요 등 부담이 만만치 않다.

 ◆세금·통신료도 요구=북한은 북한 근로자 3월분 임금 720만 달러 외에 세금과 통신료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측이 북한에 내야 할 세금은 얼마일까. 북한은 지난해 8월 ‘세금규정 시행세칙’을 만들어 10여 개 우리 기업에 최고 10만 달러의 세금을 일방적으로 부과했다. 또 입주기업이 회계조작을 하면 그 액수의 200배에 달하는 벌금을 물린다고 나섰다가 반발을 산 적도 있다. 그만큼 달러 챙기기에 골몰했다는 얘기다.

 공단 정상화를 위한 대화 제의를 거부해 온 북한은 30일 미수금을 받아 내기 위한 협의에는 적극 나섰다. 정부는 북한의 요구 중 합당한 항목은 조속히 지불하고 7명을 서울로 귀환시킬 방침이다. 단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이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특강에서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는 눈곱만큼이라도 들어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일부 기업의 체불임금 지급도 요구하고 있다. 체불임금의 경우 10만 달러 이상 밀린 곳도 몇 곳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통일부는 ‘사기업의 영업 비밀’이란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정부가 우선 북한에 체불임금을 건네주고, 나중에 해당 기업에 회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단 폐쇄의 위기감 속에 북측이 사과 요구 같은 명분 싸움보다 실리(달러) 챙기기에 집중하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북한은 2010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을 때는 시설 몰수를 선언하며 이산가족면회소와 온천장 등 4841억원 상당의 우리 정부·기업 자산을 차지했다. 이번의 경우 완전폐쇄가 아니란 점에서 공단설비 압류 등의 조치는 내놓지 않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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