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설에도 못 쉰 직장인들의 애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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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실향민도 아닌데 설에 고향이나 가족을 찾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있다. 이들은 일 때문에 명절은 고사하고 주말에도 쉬지를 못한다.

휴일이 되면 비상근무라 더욱 바쁜 사람들. 그러나 이들의 눈망울에는 누구보다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안타까움이 절절히 배어 있다.

이번 설에 귀향을 포기한 채 묵묵히 현장을 지켜야 했던 한국전력 최창호(39)과장, KT 박민(32).현대자동차 최용준(32)사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던가. 처음 만나는 서먹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고충과 바람을 얘기하면서 쉽게 의기투합했다.

못쉬는 이유

▶박민=KT 인터넷망(KORNET)을 실시간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 KORNET은 우리나라의 인터넷망이라 할만큼 전국적인 망을 구성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서비스가 제공된다. 따라서 KORNET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해 인터넷 서비스에 지장을 주는 요인을 사전 차단하는 일에는 휴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쉽지는 않지만 인터넷의 흐름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다는 점에서 흥미있고 매력적인 일이다.

▶최창호=서울의 용산구와 마포구 관내 전력설비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배전운영과에서 맡고 있다. 전력설비를 관리하는 일 역시 시간적인 공백이 있을 수 없다. 평소엔 협력업체와 함께 정전고장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기적인 점검.순시 및 각종 예방공사를 한다. 고장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아내 정전구역을 최소화하고 대기조를 즉각 투입해 고장을 복구하는 일을 총괄하고 있다.

▶최용준=긴급봉사반의 업무는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항상 사무실과 현장에서 교대로 출동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는 일이다. 고객들이 차량고장 신고를 하면 긴급출동해 고객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줘야 한다.

가족들에게

▶박="근무 때문에 설날 내려갈 수가 없다"고 했더니 고향의 가족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 오히려 내쪽에서 서운한 마음이 든다. 예전 같으면 "근무를 바꿀 수 없나"라는 식의 반응이 나왔을 터인데. 요즘 교통체증 때문에 차라리 귀향을 안하겠다는 사람이 더러 생겨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설날에 집에 가지 못하는 대신 어머니께 설 준비하시라고 용돈을 좀 더 부쳐 드렸다. 되도록 빨리 시간을 내어 고향집에 다녀올 생각이다. 조카들에게 새뱃돈으로 줄 문화상품권도 준비해 두었다. 늦었지만 선친 묘소에 성묘도 하고 집안 어른들도 찾아뵐 계획이다.

▶최창=운영과장을 맡은 지 이제 4년째인데 그동안 명절 때마다 비상대기 하느라 한번도 고향에 가보질 못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나뿐 아니라 회사의 다른 동료들도 교대근무 때문에 명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행히 대다수 직원의 가족들이 그러한 상황을 이해해 주는 분위기다. 아마도 국가 기반시설을 책임지고 있는 공기업 직원가족이라 그런 이해심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최용=변변히 해주는 것이 없어 솔직히 부끄럽다. 명절이나 휴일이 지난 이후의 월차휴가나 야간근무를 마친 비번 때 가족과 함께 지낸다. 그럴 때면 외식을 하거나 서울인근 놀이동산에 간다. 그렇게 노력해도 가족들의 만족도는 떨어지는 것 같다. 고향의 부모님들께는 명절 때 찾아뵙지 못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습관처럼 됐다. 지난 7년간 고향 어른들을 겨우 두 번 뵐수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이해해 주시고 오히려 격려해주는 말씀을 해주시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겁다.

못잊을 일들

▶박=지난 1월 25일 토요일이다. 컴퓨터 바이러스의 침투로 사상 초유의 인터넷 대란이 벌어진 날이다. 그 대란이 시작되면서 잔잔한 호수와 같던 토요일 오후의 달콤한 시간은 잇따른 전화벨 소리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 후 정신없이 사고수습에 나섰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사뭇 가슴이 떨려온다.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지나도 이 날은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최창=유난히 행사가 많았던 지난해 휴일이 기억난다. 지방자치단체장선거와 대통령선거 때는 투표가 시작되는 오전 6시부터 상황실 근무가 시작돼 투표할 시간도 없었다. 특히 월드컵 경기가 열린 지난해 6월 한 달 동안은 귀가를 포기하고 회사에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새롭다. 이밖에 1999년 12월 31일 2000년 연도인식 문제(Y2K)를 대비한 상황이 해프닝으로 끝나자 잔뜩 긴장했던 직원들이 웃으며 신년인사를 나누었던 일이 추억으로 남는다.

▶최용=96년 초겨울이었다. 야간근무를 하고 있던 휴일의 오전 4시쯤. 영동고속도로 문막휴게소에서 5t트럭이 운행이 안된다고 고장신고가 들어왔다. 당시 인근에 직원이 없어 서울에서 내가 출동하게 됐다. 안개가 많이 끼어 있어 운전이 어려운 도로를 두 시간 가량 달려 현장에 도착했다. 고객분이 나를 구세주라도 맞이하듯 반겨 주었다. 문제의 차량을 점검해 보니 적재함 밑으로 지나가는 연료호스에서 연료가 새는 고장이었다. 한겨울 날씨 속에서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간신히 응급조치를 마쳤다.그때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네며 자기를 살려준 은인이라고 감사해하던 고객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료들에게

▶박=사람이 혼자 살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해 일을 해 주지 않는가. 이번에는 우리가 신세 진 걸 갚을 때인가 보다. 가족들과 동네 친지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설날을 보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자.

▶최창=내가 휴일근무를 하는 목적은 돌발 사고에 대한 조치를 신속하게 해내기 위해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다행스럽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 없는 날이 계속되면 타성에 젖어 정작 유사시를 대비할 감각이 떨어지기도 한다. 나는 오늘 또 어떤 미묘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스릴을 느끼면서 휴일근무에 나선다. 그러면 나름대로 재미도 있다. 휴일에 못 쉬는 다른 직장인들도 기왕이면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자세와 즐거운 마음으로 근무하는 것이 어떨까.

▶최용=직업상의 의무감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과 희생정신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참아 나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명절이나 휴일에 쉬지 않고 근무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보탬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선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유권하 기자, 사진=장문기 기자

<사진설명>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대우센터 빌딩에서 설 근무로 귀향을 못하게된 박민 (左)(32세.KT 통신망 관리단), 최창호 (中)(39세.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 서부지점 배전운영부 과장), 최용준 (右)(32세.㈜현대자동차 정비협력업체지원팀 긴급봉사반)씨가 고충을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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