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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높은 자부심 반대편에서 불신이 자라는 걸 못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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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채동욱 검찰총장(오른쪽)과 박영수 전 대검 중수부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 청사 10층에서 열린 중앙수사부 현판 철거식에 참석해 행사진행을 지켜보고 있다. [오종택 기자]

23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이곳 10층 엘리베이터 앞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채동욱 검찰총장과 길태기 대검 차장, 박영수(변호사) 전 서울고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스레 터졌으나 여기 모인 30여 명의 검사와 수사관들은 말이 없었다.

 스크린 도어 옆에 걸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현판은 유독 빛이 바래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밤잠을 못 이루게 만든 ‘저승사자’였고, 누군가에게는 동경과 자부심의 대명사였으며 ‘정치검찰’의 상징처럼 여겨져 오기도 했던 이름이다.

 검찰 특수수사체계 개편 태스크포스(TF) 소속인 이두봉 대구지검 부장검사의 중수부 연혁 보고가 끝나자 25대 중수부장(2005~2007년)을 지낸 박영수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박 변호사가 중수부장일 때 수사기획관이 채동욱 검찰총장이다. 당시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 등 굵직한 사건 수사를 함께 지휘했다. 박 변호사는 중수부 폐지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중수부장 시절) 외풍으로 수사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중수부 수사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난관을 돌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훌륭한 수사시스템이 국민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폐지되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게 검찰인의 도리”라며 “오늘의 중수부 폐지가 새로운 검찰로 도약하는 발판이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당부했다.

 특수수사체계 개편 TF 팀장인 이동열 서울고검 검사가 마이크를 건네 받았다. 그는 “드높은 자부심의 반대편에서 정치적 중립과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자라고 있음을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무성하게 자란 그 불신을 넘지 못해 중수부는 막을 내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중수부 현판을 내리지만 부패를 단죄하기 위한 검찰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검찰의 특별수사체계를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오늘 시작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 흰 장갑을 낀 박유수 대검 관리과장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현판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1981년 설립돼 32년 동안 쌓아온 영욕(榮辱)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중수부장으로 기록된 김경수(53·사법연수원 17기) 대전고검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달리 할 말이 있겠느냐”며 “죄스러운 심정”이라고 말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심경을 내비쳤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오랫동안 사정수사의 중심이었던 중수부의 폐지는 부패한 권력을 단죄해 온 중수부가 스스로 권력이 됐기 때문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일선 지검의 한 검사는 “몇 년 전부터 중수부가 좌고우면하거나 정치적 형평성 맞추기에 급급해 왔다는 지적이 적잖았다”며 “검사들이 정치적 배려를 고민하는 순간 이미 중수부의 명(命)은 다한 것이지만 언젠가 중수부 조직이 필요한 시기가 다시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서로만 남은 중수부=이날 현판은 내려졌지만 중수부는 아직 법적으로는 살아 있는 조직이다. 중수부 운영의 근거인 ‘검찰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이 아직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야가 상반기 중 법령 개정에 합의한 데다 검찰이 이날 공식적으로 중수부 활동 종료를 선언했기 때문에 중수부는 문서로만 남아 있는 조직이 됐다.

 중수부 활동 종료와 함께 검찰의 특별수사체계 개편작업은 속도를 낼 전망이다. 검사장급인 오세인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 지휘하는 TF는 일선 검찰청의 특수수사 지휘와 지원방안, 일선 검찰청 단위를 넘어서는 부정부패사건 특별수사팀 구성, 특임검사 확대운영방안 등의 체계를 마련할 예정이다. 대검의 한 간부는 “앞으로 정치권이 추진 중인 상설특검, 특별감찰관제에 대한 대응방안 등이 주요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동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 사진1> 대검찰청 박유수 관리과장이 23일 서울 서초동 대검 청사 10층에서 현판 철거식을 마친 뒤 중앙수사부 현판을 떼어내 검찰 역사관으로 옮기고 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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