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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졌다 일어났어요, 노숙인 월드컵 덕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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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노숙인 출신 임흥식씨(오른쪽)와 구영훈씨는 2011년 프랑스에서 열린 홈리스 월드컵에 출전한 뒤 인생이 바뀌었다. 노숙인 잡지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임대 주택에도 입주했다. 임씨는 청각 장애견을 입양해 키우는 여유까지 생겼다. 임씨와 구씨가 22일 서울 영등포의 한 공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안성식 기자]

‘공 하나가 바꾸는 세상(A BALL CAN CHANGE THE WORLD)’.

 노숙인 출신 임흥식(57)씨와 구영훈(46)씨는 홈리스 월드컵의 슬로건처럼 축구공 하나로 인생이 바뀌었다. 전기기술자 임씨는 4년 전 사고로 한쪽 눈을 잃고 직장까지 잃은 뒤 영등포역에서 노숙했다. 비닐회사 하청업체를 운영하던 구씨는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부도가 나 을지로역에서 하루살이 생활을 했다. 22일 서울 당산동 빅이슈코리아 사무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홈리스 월드컵에 참가한 뒤 인생 2막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홈리스 월드컵은 노숙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노숙인들이 축구를 통해 자활 의지를 갖게 하려고 2003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된 대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신화를 쓴 베베(23·리오 아베)가 2009년 포르투갈 홈리스 월드컵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임씨와 구씨는 2011년 우연히 홈리스 월드컵 한국 대표 선발전 공고를 보고 지원한 뒤 그해 8월 프랑스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했다. 임씨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그해 8월 10일 삿포로에서 일본에 0-3 참패를 당했다. 우리가 2주 뒤 3-0으로 설욕해줬다. 국가를 대표해 뭔가 해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구씨는 “외국 노숙인들은 한국 노숙인들과 달리 표정이 정말 밝았다. 외국은 한국처럼 빈곤을 죄악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며 “스웨덴 등 부자 나라 노숙인팀 스폰서가 한국 대기업들이었다. 우리는 중소기업 펠틱스가 용품 지원을 해준 게 전부였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숙인 월드컵 홍보대사인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은 “외국인이 보면 전세 사는 나도 홈리스다. 노숙인들은 집이 없을 뿐이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아르센 웽거 아스널 감독,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 등이 홈리스 월드컵 홍보대사를 맡는다”고 말했다.

 임씨와 구씨는 대회를 마친 뒤 ‘태극마크까지 달았는데 못할 게 없다’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노숙인 잡지 ‘빅이슈코리아’를 팔며 자립했다. 한 달 수입은 90만원 남짓이다. 구걸로 하루에 3만~5만원을 번 것과 비슷하지만 정당한 노동으로 돈을 벌어 뿌듯하다고 했다.

 둘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 주거복지재단의 도움으로 임대주택에도 입주했다. 구씨는 연락이 끊겼던 부모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종종 찾아뵙는다. 임씨도 용기를 내서 연락이 두절된 아들을 찾고 있다. 프랑스 대회 주장이었던 이승교(44)씨는 유리 제작 업체에 취직했고, 지난해 멕시코 대회에 출전한 임철(38)씨는 아름다운가게에 취업했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았고, 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올해 홈리스 월드컵은 8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열린다. 한국 대표 선발전은 빅이슈코리아와 국제개발 비정부단체인 굿피플 주관으로 26일 영등포공원 풋살장에서 치러진다. 1차로 16명을 뽑은 뒤 8명을 최종 선발한다. 임씨와 구씨는 “대회 취지상 딱 한 번만 출전할 수 있다. 노숙인들이 용기를 내서 신청하길 바란다. 축구를 통해 다시 일어섰으면 한다. 우리가 증명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글=박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홈리스 월드컵=영국의 사회적 기업 ‘빅이슈’ 창립자 존 버드의 제안으로 2003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돼 매년 열린다. 지난해 세계 70개국이 참가했다. 한국은 2010년 브라질 대회부터 개근 중이다. 골키퍼를 포함한 4명이 한 팀을 이뤄 16×22m 크기의 소규모 경기장에서 하루 1~2경기를 치른다. 전·후반 7분씩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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