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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을 영욕의 그늘에서…|선로수-수색보선소 신현우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철로의 길이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서 이 길을 다지는 것을 의무로 아는 나의 각오도 점점 굳어져 왔읍니다.』 밀차를 타고 곡괭이를 들고 철길 다지기에 잔뼈가 굵어졌다는 서울 보선사무소 수색보선분소 제1선로반장 신현우(48·서울 마포구 신수동 63)씨는 수색역앞 철길을 가리키면서 철길만이 자기인생의 전부라고 했다.
경기도 파주군 교하보통학교를 졸업한 신씨는 일제 때 철도국인부로 들어갔다가 해방과 함께 선로수가 되었고 이 뒤 서울보선사무소 선로수, 충남판교선로반장, 서강선로반장, 주안선로반장을 거쳐 지난 65년부터 수색선로 반장직을 맡았다했다.
선로수들은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아침 8시반에 출근, 매일 계획된 작업장에서 10명 안팎이 1조가 되어 보선작업을 한다.
『우리들의 최대 관심은 사고 없는 나날과 월급날 주는 최소한도의 생활비뿐이죠.』 신씨는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누가 국회의원이 되든, 누가 장관이 되든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관여할 필요조차 없다면서도 6·25땐 철도노조 수색분회 간부직을 맡았던 덕분으로 좌익분자들의 눈을 피해 살아야만 했었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신씨는 『전국평의회가 주동이 되어 식량배급과 임금인상 등 요구조건을 내건 경성철도공장의 파업이 나중에는 신탁통치찬성과 미군정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로 변모하는데는 깜짝들 놀랐죠.』
『주안선로반장으로 있을 때였죠. 새벽부터 한낮까지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다가 그쳤읍니다. 그때 분소장이 갑종경계(몇미터 간격으로 서서 항시경계)를 을종경계(1시간마다 순회감시)로 변경명령을 내렸읍니다. 나는 경험에 비추어 높은 둑은 비 올 때 보다 비가 밑으로 스며드는 3, 4시간 뒤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분소장의 지시를 어기고 계속 근무령을 선로수들에게 내렸죠. 아니나 다를까 오후 4시께에 둑이 무너지고 침목 밑으로 15미터가량 패이기 시작하더군요. 이때 열차가 막 신흥을 떠나 주안으로 들어올 때 였읍니다.』 신씨는 지난 4월 모범종사원으로 표창될 때 받은 금「메달」을 보이며 은근히 자랑-.
떠꺼머리 총각이 2남3녀의 가장이 되고 선로수가 반장으로 승격되는 동안의 노력 끝에 이제는 멀리서 기차가 올 때 선로에 귀만 대어 보아도 어느 부분에 이상이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게 만들었다고 했다.
매일 담당구역을 한번 이상 돌아다니면서 「레일」부속품·「포인트」부속품·침목 등의 이완·노출을 검사, 운전에 지장이 있는지를 조사하다보니 22년 동안 전국 철도 총 길이(4천9백킬로)를 두 번 이상 둘러본 셈이라는 것.
현재 신씨의 수입은 수당까지 합해야 고작 1만1천원. 기능직인 선로수의 초봉이 6, 7천원임을 생각하면 22년이란 긴 세월에 겨우 5천원 정도가 오른 셈이다.
『사고가 없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월급 같은 것은 별로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1년에도 1억원이 넘는 열차승객들이 그들의 안전여행 뒤엔 우리 같은 사람들의 피땀이 어려있다는 것만 알아준다면 좋겠어요.』 힘이 다 할 때까지 선로와 함께 웃고 울겠다는 신씨는 고됬던 지난날을 더듬는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돈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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