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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기록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 충무공의 한산대첩이 과연 얼마나 통쾌한 장관을 이루었는지 궁금한 때가 있다. 한 폭 그림이라도 남아있어 고증해 준다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기원전 4세기의 벽화 「알렉산더」대왕의 「이수유전투」는 당시의 어용화가 「아벨」의 역작일 뿐 아니라 문자보다 선명한 기록성을 지닌다. 또 「로마」 황제의 초상 「까자깔라」 「네롱」 「아그리핀」을 비롯하여 승리탑·개선문 등에 정밀하게 부각해놓은 여러 승전광경은 그 예술적 가치로나 역사적 고증으로나 귀중하게 취급되고 있다.
이태리 「르네상스」 시대도 그러했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의 초상, 단편적 귀족생활의 일화 및 싸움터 등에 대한 묘사는 당시 사회상과 국시를 엿보게 한다. 「우쩰로」의 『에지디오전쟁』은 그 남긴 바 영향이 뚜렷한 예술품이요, 사료이다. 특히 근세서구의 여러 왕조는 자신들의 초상은 물론 왕조의 번영과 위용을 시위키 위해 벽화로 그려 궁궐 내에 영구 보존시키는 한편 장식으로 삼았다.
「나폴레옹」도 예외가 될 리 없다. 그는 당시의 대가들을 어용화가로 삼아, 국위를 선양하는 역사적 주제로 작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로」의 『나자렛전상』 『자화의 흑사병 환자들』 「지로데」의 『카이로의 폭풍』- 이것들은 기록성만이 아니요, 화면구성이나 실감나는 사실성에 드러난 작가의 인내력·관찰력·감수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제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미관이 확실히 달라졌다. 모든 사실은 우선 사진·영화·출판 등으로 기록케 됐고 예술은 새로운 차원에서 출발케 됐다. 예술은 「니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정신과 「창을 열고 자연을 바라보라」고 한 「세잔」의 시관으로 새 시대의 시점을 삼게 됐다.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화전이 지난 7월 12일 개막, 8월말까지 전시된다. 이 민족기록화는 5백 내지 1천호의 대폭 50점.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이번 제1차분에 이어 2차, 3차로 더 제작해 특별 영구보존 기념관까지 마련하리라고 들린다. 그 취지는 애국심을 앙양하고 민족 수난의 쓰라림을 길이 새기자는 데 있을 것이며, 동시에 작가들에게 예술적 충동을 도모할 의도였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록화의 생명인 사료·예술·영구·가치 등이 이번 전시된 작품들엔 한결같이 결여돼 있다.
권위층에 대한 예술인의 솔직하고 건설적인 제의는 내일의 우리 나라 예술분야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할 것이다. 이번 민족기록화전 주최측은 기왕이면 보다 효과적이며 능률적인 방안을 모색해 주길 바라고 싶다. <임영방 미술평론가·철박>

<새필진>
이번 주일부터 본란을 다음 네분이 써 주시기로 했읍니다.
▲한상준<과학기술연구소 기술정보실장·이박>
▲박용구<예그린 악단장·음악평론가>
▲이상금<이대 부교수·아동 교육>
▲임영방<미술평론가·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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