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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사의 새 사료로|「동학란」 판결문 발견과 대검 구 기록 - 최영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 해에 몇 번씩은 새로운 우리 나라 역사자료가 발견되었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이번 동학난 관계 판결문 등도 그 한 예가 된다.
이 기록이 발견된 경위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을 위한 사료 중 일제시대의 취조서 판결문 등을 수집하기 위하여 대검찰청의 협조를 얻어 윤병석 편수관 등이 대검 서고에 수장되어 있는 문서를 조사하다가 얻어진 것이다. 신문에 보도된 전봉준 등의 사형판결문 등등은 대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문서(3백여척으로 추산) 중의 1책으로 개국 504년(1895년) 중의 판결문철인데 이중에는 동학교도 외에 역사적 사건으로서는 이준용 모역사건과 을미사변 관계와 기타 토색민란·난언·약인·사주전 등의 범죄에 대한 것이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제까지 전국에 걸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한말부터의 공판기록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는 곳은 청주지방 검찰청과 밀양지청인데 청주에는 의병 및 3·1운동에 관한 귀중한 기록이 잘 보관되어 있고 밀양에는 형사범기록(항일운동 관계는 형사범에 속한다)은 없고 민사기록만이 남아있다. 앞뒤가 몇 장씩 뜯어져 나간 예심결과서 1편을 얻어보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일을 생각하면 대검서고는 공판기록의 보고와 같은 것이다.
전봉준의 사형 선고문을 보면 개국 504년(1895년) 4월 1일 법무아문권설(임시특별) 재판소 선고로 되어있고 이의 서명자는 법무아문의 대신 협변(차관급) 참의(형사국장) 주사 2인(평사국 주사)이며 경성주재 일본영사가 회심하고 있다.
이때는 한국정부의 내정개혁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이 내정에 간섭하고 있을 때며 일본 영사가 전봉준을 5차에 걸쳐 문초하였던 것이다(이 기록이 전봉준 공초이다). 그런데 전봉준의 사형 집행일은 당시의 관보 등에 의하여 3월 29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이 선고문에 의하여 적어도 선고일인 4월 1일 이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는 법무대신 등이 전봉준의 사형을 결정 서명한 3월 29일은 법률 제1호로 반포된 재판구성법이 시행되기 이틀전이요 선고일인 4월 1일은 바로 그 시행일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전봉준의 사형결정은 재판구성법에 구애받지 않도록 서두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검에 소장되어 있는 공판문서는 그 자체가 법제사의 유물적 자료가 될 뿐 아니라 한국근대사의 사료가 된다. 그러나 이들 공판기록은 역사사실을 규명하는 사료로서는 신빙성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것이다.
동학란은 지금에는 그 항일 또는 사회개혁 운동이 높이 평가되어 동학학명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는 비도로 취급되어 처단되었듯이 국가에서 행한 재판이란 그 당시의 정치 법률에 입각하여 공정히 다루어졌다 하여도 그 시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정치적인 이유에 의하여 사실이 왜곡될 때도 있다. 전기한 판결문철에는 대원군의 애손 이준용 모역관계 사건과 을미사변에 관한 판결문도 끼어 있다.
그런데 이준용 모역 사건의 판결문은 모역 음모를 시인하고 각인에게 형을 내리고 있으나 이 사건은 대원군과 친일개화파 또 민비파 간의 알력 속에서 폭로된 의옥이었으며 이 재판은 외국 공사들의 압력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또 기미사변의 판결문을 읽어보면 일제가 민비 시해의 책임을 한국인에게 전가하고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기 위한 날조문서라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끝으로 이 계통문서로서 형무소(교도서)의 「형 집행 지휘서」 「신분대장」과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는 범죄인에 관한 대장이 중요한 기록임을 들어두기로 한다. <국사편찬위원회편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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