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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칠 줄 몰라 지휘 학교 탈락 독학으로 거장 반열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9호 06면

“지휘는 생명체를 대하듯 해야 합니다. 손에 쥔 새를 다루는 것 같아요. 너무 세게 쥐면 새는 죽어버리겠죠.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쥐면 날아가 버릴 겁니다.”

14일 타계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콜린 데이비스

14일 콜린 데이비스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86세. 토머스 비첨 이래 가장 중요한 영국 출신 지휘자로 평가받는 거장이었다. 데이비스는 ‘현재’를 표상하는 지휘자였다. 그는 마술적이거나 환상적인 과거의 지휘 거장들과는 다른, 현실적이고 튼튼한 음악을 만들었다. 특히 베를리오즈 작품들에 대한 해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모차르트·시벨리우스·브람스·베토벤·바로크와 현대음악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골고루 잘했다. 솔로이스트와 라포르(공감대)를 형성하며 협주곡 해석에도 뛰어났던 소통의 지휘자였다. 백건우도 아라우와 데이비스의 브람스 협주곡 녹음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데이비스는 1927년 영국 서리주 웨이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애호가였던 부모 덕에 집에는 늘 축음기와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아노를 살 만큼 넉넉하지는 못했던 집안 형편 탓에 그는 비교적 값싸게 구할 수 있었던 클라리넷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왕립음악원에 진학했을 때는 동급생인 명클라리네티스트 저베이스 드 페이어의 그늘에 가렸다. 이미 13세 때 베토벤 교향곡 8번 공연을 보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데이비스였지만, 지휘와 입학은 거부당했다. 피아노를 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곧 군대에 징집된 그는 근위병 군악대 클라리네티스트로 복무하며 런던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종종 참관했다.

독학으로 지휘를 공부한 그는 1949년부터 프리랜서 지휘자로 활동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57년엔 BBC 스코티시 심포니의 부지휘자가 됐고, 59년엔 몸이 아픈 오토 클렘페러의 대타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콘서트 형식으로 지휘해 호평받았다. 데이비스가 새들러스웰즈 오페라와 런던 심포니, BBC 심포니 등을 지휘한 것은 60년대였다. 특히 64년에는 런던 심포니의 월드 투어를 이끌었는데, 그해 11월 우리나라에도 들러 시민회관에서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등을 지휘했다. 71년 게오르그 숄티의 후임으로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수석지휘자로 취임한 데이비스는 86년 후임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취임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재임기간 중인 79년 가을 로열 오페라와 함께 내한한 데이비스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푸치니의 ‘토스카’를 지휘했다. 쌀 한 섬이 6만원이던 시절, 3만원이었던 티켓 가격도 화제였다.

그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건 95년. 12년이란 세월 동안 데이비스는 자국 명문 악단의 브랜드를 더욱 강화시켰다. 브루크너·브람스·베를리오즈를 자주 무대에 올리고 웹사이트에서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했다. 독립 레이블 ‘LSO Live’를 설립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2007년 게르기예프에게 지휘봉을 넘겨준 뒤에도 LSO 단장이 돼 계속 일했다.

80세가 넘어서도 활동을 이어가던 그도 2010년 아내가 사망한 뒤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지난해 5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하다 쓰러진 그는 한 달 뒤인 6월 런던 심포니를 지휘해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것이 공식 연주회 마지막 공연이었다. 생애 마지막 지휘는 올해 3월 런던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연주회로 알려졌다.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핸디캡을 딛고 독학으로 자신을 세워 지휘뿐만 아니라 행정에도 리더십을 발휘했던 데이비스. 그가 남긴 수많은 음반을 통해 그의 예술혼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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