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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니콜라이」 3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 「알렉세이」가 미국 정보기관에서 활약하고 있다면 얼른 납득이 안갈 것이다. 왕년의 「폴란드」 고급정보장교 「미카엘·고레니에프스키」 중령이 바로 황태자 「알렉세이」라면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니콜라이」 2세의 가족은 1918년 「시베리아」의 쓸쓸한 유형지에서 전원 처참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고레니에프스키」 「폴란드」 중령이란 변성 명으로 2년 반에 걸쳐 미국 정보기관과 내통, CIA까지 소련의 정보망이 뻗쳐 있다는 굵직한 정보를 제공해준 문제의 사나이가 「알렉세이」 황태자라는 사실이 최근 「리처드」라고 하는 미국의 한 언론인에 의해 백일하에 밝혀졌다.
「고레니에프스키」 중령, 아니 「알렉세이」 황태자가 미국 정보기관에 제공한 정보가운데 「바르샤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 「스카베크」가 소련의 첩자였다는 것, 미국 외교관의 부인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특수훈련을 받은 소련정보기관의 유혹을 받은 일, 그리고 주요국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소련 정보망이 얼마만큼 깊이 침투하고 있느냐 하는 것 등이 들어있다.
정보원으로까지 전락한 전황태자 「알렉세이」의 인생역정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 그것이다.
1904년 8월 11일 정오 「페테르스부르크」의 요새는 일제히 3백발의 축포를 올렸다. 왕녀만 넷을 둔 「니콜라이」 2세가 소원이던 황태자를 낳은 것이다. 그가 곧 후의 「폴란드」 정보장교 「고레니에프스키」라는 「알렉세이」 황태자. 그의 가계도 그의 인생만큼 복잡했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조부,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조카뻘, 「덴마크」의 「크리스천」 9세는 증조부가 되는 판이었다.
여순 항의 소련함대가 일본해군에 의해 지리멸렬했다는 홍보가 날아들어 오자 축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스웨덴」의 기사, 「시베리아」 보병사령관, 「코작」 사령관으로 추대된 「알렉세이」는 그후 10년간 미래의 황제에 손색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보냈다. 1914년 「니콜리아」 2세가 대독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사태는 역전, 처음에 군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 황제는 「페테르스부르크」 소요발생으로 부득이 퇴위해야만 했다.
퇴위 후 황제일가는 광산도시 「에카데린부르크」로 추방, 몽땅 살해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유력한 설은 화제일가가 무사히 「폴란드」에로의 탈출에 성공, 근대 「폴란드」의 아버지 「피르스츠키」 원수의 도움으로 그곳에 정착하였으며 「알렉세이」 황태자도 이 원수의 힘을 입어 「폴란드」 정보장교로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한다.
「고레니에프스키」라는 이름으로 당국의 신임을 산 「알렉세이」는 「단치히」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활약하여 인정받았으며 45년에는 60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대위에 승진했다. 공산주의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그인지라 비밀결사의 일원으로 「폴란드」의 반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다. 군의 첩자로서, 비밀조직의 거성으로, 그리고 황태자의 신분을 숨기는 철저한 「폴란드」인으로서의 삼중의 생활을 해오던 그가 미국 정보기관의 첩자로까지 사중생활을 하게된 것은 「폴란드」 민중봉기사건 때문이었다.
10월 민중봉기가 실패하자 「폴란드」의 해방은 다른 나라의 결론에 도달, 미국에 접선키로 마음을 먹었다. 하나 CIA내부에까지 소련의 간첩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을 알고 FBI만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 당시의 「후버」 장관에 선을 대고 33개월에 걸쳐 소련의 간첩활동을 제보했다. <신상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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