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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의 「처음과 끝」|지금까지의 미·소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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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때까지의 산고가 무척 심했던 「글라스보로」미·소 정상회담이 연 11시간의 토의를 역사의 기록에 남긴 채 우리 나라 시간으로 26일 상오 7시24분에 끝났다. 「존슨」·「코시긴」회담이 중동분쟁해결에 얼마만큼 기여하였냐는 앞으로 두고 볼 수밖에 없으나 미·소 평화공존체제의 「흔들림」을 바로잡는데 이바지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분쟁의 밑바닥에 미·소 두 거인 구의 손끝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어느 국제적 문젯거리 치고 미·소의 합의 없이 해결된 것이 없다는 게 오늘날의 국제정치역학의 기본공식이다. 「이스라엘」이 「아랍」영토에 대한 반환문제를 둘러싸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미·소의 이견이 이번 기회에 얼마쯤 조정을 봤느냐는 구체적인 시사가 없다하나 『소련국민과 미국국민의 우호를 찬양한』 「코시긴」의 표정이나 「코시긴」수상의 이 말을 흐뭇해하는 「존슨」 대통령의 미소는 분쟁을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하려는 밝은 분위기가 조성되었음을 가리켜 주는 것이 아니가 한다. 월남문제에 대해서도 그리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는 정도로 그치고 핵확산금지 협정에 의견이 크게 접근한 것이 정산회담의 큰 성과의 하나로 손꼽힌다는데 일말의 실망도 없을 수 없으나 그 많은 난제 꾸러미가 거두회담에서 하루아침에 도려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 정도로나마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의사소통의 가교라도 마련된 것은 앞으로 세계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징검다리 구실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33년 소련을 승인한 이래 여덟 번(미·소 거두만이 합동한 것은 네 번째)이나 되는 미·소 정상회담의 약사는 다음과 같다.
▲테헤란회담=43년「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3거두는 서독의 제2전선 형성과 전쟁 계획에 합의를 봤다.
▲얄타회담=45년 2월 4일∼12일 대독작전의 마지막 단계를 협의하기 위해 3거두 재회.
▲포츠담회담=45년 7월 17일∼8월 1일 대독 「얄타」협정수행을 논의코자 「트루만」「스탈린」「처칠」등 회합
▲제네바회담=55년 7월 18일∼23일 「아이젠하워」「흐루시초프」회합. 이른바 「제네바」정신이란 말이 여기서 생겼다.
▲캠프·데이비드회담=59년 9월 25일∼27일 「아이젠하워」「흐루시초프」회담, 미·소 두 수뇌만이 대좌하기는 이번이 처음, 일반 군축 등 논의
▲파리회담=60년 5월 이른바 U2기 사건으로 유산, 「아이젠하워」「흐루시초프」회담 예정.
▲빈회담=61년 6월 3일, 4일 「케네디」「흐루시초프」의 대결, 상대방의 실력을 서로가 그대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상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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