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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제2 한국전은 세계경제 재앙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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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29면

월가의 이단아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를 일약 스타로 만든 블랙스완(black swan). 흰 백조만 있는 줄 알았던 유럽인들이 1697년 호주에서 검은 백조를 목격한 이후 ‘불가능하다고 인식되던 게 실제 발생하는 상황’쯤으로 통하는 말이다. 탈레브는 2007년 월가의 허상을 파헤친 『블랙스완』 출간을 앞두고 “조만간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재앙이 월가를 덮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하지만 이듬해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글로벌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그의 통찰력은 집중 조명을 받는다.

그로부터 서방에선 해마다 블랙스완 후보를 짚어보는 게 유행이다. 지난해에는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꼽혔다. 원유 생산과 수송이 차질을 빚게 돼 세계경제를 후퇴시킬 것이란 시나리오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올 들어서는 ‘제2의 한국전쟁’이 블랙스완 으뜸후보다.

중동과 한반도의 전쟁 발발은 엄밀히 따지자면 탈레브가 말하는 블랙스완에 해당하지 않는다. 두 지역의 전쟁은 과거에도 있었고, 그 재발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블랙스완이라면 소련의 붕괴나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다. 과거에 없던 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고,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온 사건이다. 게다가 사건 이후에는 발생 원인이나 과정이 매끄럽게 술술 설명되며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던 일로 여겨진다. 그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한반도 전쟁은 굳이 급을 정하자면 ‘그레이스완(gray swan)’ 후보다.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았지만 실제 발생하면 메가톤급 충격파를 몰고 올 대사건이 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위험자산의 가치는 떨어질 게 자명하다.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공포 때문이다. 동아시아 주식시장은 활기를 잃게 돼 있다. 또 일본 엔화는 달러와 함께 안전자산으로 부각될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엔화 값 떨어뜨리기를 크게 거스르는 흐름이다.

일본은 한국과의 무역에서 지난해 361억 달러 등 매년 수백억 달러의 흑자를 내고 있다. 현대전이 교역에 악영향을 준다고 볼 수만 없다지만 무역대국인 한국이 수출품 생산에서 차질을 빚는다면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수출 또한 타격을 입게 돼 있다. 한국은 지난해 무역 1조 달러를 돌파했다. 미국·중국·독일·일본·네덜란드·프랑스·영국 다음의 세계 8위 무역국이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앞선다. 또 한국 수출품의 태반은 다른 나라가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부품·원료다. 한국의 공장들이 멈추면 한·중·일의 분업 구조가 흔들리고, 세계의 서플라이 체인마저 군데군데 끊어지고 만다.

금융시장은 더 복잡하다. 한국의 주식과 채권 가격이 급락하면서 이곳에 투자한 서방 자금은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커진다. 일시적이겠지만 외환시장과 증권시장의 정부 통제로 투자금이 국외로 빠져나갈 길도 막힌다. 제2의 한국전쟁은 군수품 특수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충격파로 세계경제를 위축시킬 게 확실하다. 1930년대 대공황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은 뉴딜정책이 아니라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전쟁을 치르는 미군에 각종 군수물자를 공급한 일본 기업인들도 “전쟁은 천우신조”라며 반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투자와 교역으로 얽힌 오늘날의 동아시아에서 대규모 군사 충돌은 세계적 경제 재앙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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