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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대 440㎐의 ‘도’ … 너 아직 살아있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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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27면

음악가가 선택하는 ‘음정’은 시대에 따라 오르내린다. 1941년 벡스타인 피아노를 연주하는 디누 리파티의 두 손. [EMI]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쯤, 즉 2003년께의 일이다. 당시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박성용 명예회장님께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흥분하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음정 취향

“열음이니? 집에 조율사가 왔는데 말이야. 440이 좋니? 442가 좋니?”
“피아노 피치요? 저는 440이 좋은데요… 요새는 다들 442로 하더라고요….”
“그러면 442로 해야 되니? 너는 어떤 게 더 좋니?”
“음… 저는 440이 좋아요. 하지만 요새는….”
“그렇지!? 맞지? 알았다!”

몇 시간 후 회장님과 일하던 그룹의 상무님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회장님댁 피아노를 조율하러 온 조율사가 음정을 442㎐로 맞추겠다는 걸 회장님은 440㎐로 해달라고 요구하셨고, 조율사는 요새는 아무도 그렇게 안 한다며 신념 있게 맞선 거였다. ‘요새 누가’에서 흥분하신 박 회장님께선 아는 음악가 중 가장 어린 나에게 바로 전화를 거셨고, 뜻하지 않은 지원사격에 결국 조율사 선생님은 440㎐로 조율을 마치고 가셨다고.

그랬다. 나는 440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A 440㎐. 어렸을 적부터 내가 내 목소리로 ‘가온 도’ 음을 낼 때의 그 느낌이 440㎐로 조율한 가온 도 음과 가까웠다. 그 느낌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도’에 해당하는 음의 주파를 세로로 늘린 직사각형이라 가정하고 그걸 세 칸으로 나누었을 때 경계선 두 줄 중 아래에서 첫 번째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음이다. 그것이 맞게 느껴진 이유는, 그것이 내 시대의 ‘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음감이 모태로부터 나는 것이라면 엄마가 나를 배 속에 가지고 있던 시절이, 절대음감이 훈련을 거쳐 확립되는 것이라면 80년대와 90년대 사이 언젠가가 바로 ‘내 시대’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음정’만 한 시대정신이 없다. 누가 그러자고 정하는 것도 아닌데, 쉼 없이 변하면서도 마냥 낮아지거나 높아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1640년 작 Vienna Franciscan Organ은 지금보다도 훨씬 높은 A 457.6㎐였다는데 50여 년 후 1699년 파리 오페라에서는 현격히 낮아진 404㎐가 표준으로 쓰였다. 백 년이 지난 모차르트 시대에는 421㎐를 사용했고 1812년에는 현재와 비슷한 440㎐가 잠시 표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36년 플레이엘에서 내놓은 피아노는 446㎐까지 올라갔고 1880년 에라르 피아노는 455.3㎐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상한 건 같은 해에, 현재 최고급 피아노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스타인웨이사가 436㎐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1925년 미국에서 440㎐를 받아들였고 1939년에는 세계적으로 채택되었다. 음정이 시대를 모방한 건지, 시대를 고양한 건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건, 박 회장님과의 에피소드가 고작 10년이 지난 지금, 그 어디서도 440㎐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피아노도 오케스트라도 이제는 모두 442㎐를 표준으로 하고 독일 등지에서는 심지어 444㎐를 사용하기도 한다. 친한 바이올리니스트 몇 명은 큰 연주장에서는 높은 음정이 맞게 들린다며 그보다도 더 높은 음정을 선호하곤 한다. 바야흐로 나의 ‘도’가 이제 나만의 ‘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나도 A 442㎐나 444㎐의 ‘도’ 음을 소리 낼 수 있기는 하다. 지금 가장 널리 쓰이는 442㎐의 경우, 아까 그 직사각형 그림 중 아래에서 두 번째 경계선 정도가 된다. 아, 사실 그것보다 내 머리에 더 많이 떠오르는 그림이 따로 있다. 피아노의 제일 밑음 라부터 제일 윗음 도까지의 건반 여든여덟 개를 계단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새로운 ‘도’는 맨발로 건반을 밟은 느낌이 아니라 빳빳한 담요 같은 것을 깔고 그 위를 밟은 것 같은, 그런 살짝 높은 소리다.

문제는 내게 그 느낌이 예전 440㎐의 ‘도’를 낼 때의 안정된 느낌과는 비할 바 없이 별로였던 것이다. 나에게 이 ‘도’는, ‘도’가 아닌 것 같은데 ‘도’이긴 하니까 할 수 없이 ‘도’라고 내는 ‘도’인 것이다. 이 껄끄러운 느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니 처음에는 까마득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인 지금은 이 음에 익숙해지다 못해 예전에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맞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도’를 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도’를 상상하면 으레 새로운 ‘도’가 먼저 떠오른다. A 440㎐의 내 ‘도’를 내려면 A 442㎐의 ‘도’를 먼저 소리 낸 후 밑으로 조금 끌어당기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머릿속에서 2초 정도 상상하고 소리를 냈는데 나만의 ‘도’가 나올 때, 그러니까 아까 그 직사각형의 첫 번째 경계선 즈음에 소리가 착 걸릴 때의 그 쾌감은 쉽게 표현할 수가 없다. 또 그 음을 지속할 때 마치 그 경계선을 어떤 사각형의 무거우면서도 표면이 매끈한 물체가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그 느낌을 유지하는 것도 기분 좋은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러면서도 이 ‘도’가 한동안은 쓰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 한편이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은 혼자서 이 ‘도’를 내본다. 아직은 살아있나 확인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다시 네 시대가 올지도 몰라, 그러니 그동안 몸조심하고 잘 살아있어’ 하고 청승맞은 혼잣말을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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