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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휘둘리지 말고 차분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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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혜민 스님
미 햄프셔대 교수

사람들은 누구나 갑자기 닥친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면 마음의 카메라가 슬로 모션으로 그 장면들을 찰칵 찰칵 천천히 찍어 놓는다. 평소의 기억은 망각의 강으로 잘 흘려 보내지만, 그렇게 슬로 모션으로 찍어 놓은 장면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2001년 가을에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어디서 그 뉴스를 처음 접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가 많다. 그 당시 뉴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나는 교내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나 또한 충격으로 망연자실했던 그 순간이 슬로 모션으로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9·11 테러가 일어난 직후에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매일같이 호소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연이은 다른 테러가 미국 내에서 또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공포에 휩싸여 기존 삶의 평정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일상생활이 마비되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테러리스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많은 뉴욕 시민이 내면의 공포에 휩쓸리지 않고 하루하루 평소와 다르지 않게 차분하게 생활하려 노력하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는다.

 반복되는 북한의 위협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는 반면 외신, 특히 미국 방송에서는 마치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들썩이고 있다. 한 미국 기자는 캐나다가 북한처럼 미사일을 쏘겠다고 한다면 미국인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이렇게 평온하게 있을 수만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 차분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들썩거리는 보도 형태가 오히려 북한의 의도에 그대로 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말에 휘둘려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야말로 북한이 이번 사태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이 아닐까. 사람들 내면에 조성된 공포감을 담보로 해서 북한이 원하는 방향대로 협상을 끌어가고자 하는 속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11 사태 이후 나에겐 또 한 가지 잊지 못하는 기억 속 장면이 있다. 당시 미국은 빈라덴을 비롯한 탈레반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응당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그런데 9·11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 맨해튼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틱낫한 스님을 초청해서 상처받은 뉴욕 시민들을 위로하는 대규모 강연회가 열렸다. 교회에서 스님을 모시고 강연을 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지만 스님의 강연 주제인 ‘분노를 껴안자’라는 말씀이 더 인상적이었다.

 스님께서 하신 좋은 말씀 가운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우리가 상처받았다고 해서 똑같이 상처를 주려고 하면 그 갈등은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내가 또다시 다치게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미움과 폭력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이해와 용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진실을 스님께서 그 시점에서 다시 상기시켜주셨던 것이다. 또한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 전쟁 때 마을 전체가 미군으로부터 폭격을 받아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분노가 치밀었는지 말씀하셨다. 하지만 가해자인 미군들 역시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는 점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터로 끌려 나와 그들 또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용서의 문을 열 수 있었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빈라덴과 탈레반을 미워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도대체 미국이 그동안 어떻게 했기에 왜 그들이 이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지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된 북한의 전쟁 위협에 지치고 두렵고 짜증이 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일지 모른다. 또한 이런 위협을 상습적으로 하는 북한 수뇌부가 싫고 미운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냥 미워하는 감정에서만 멈추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감정적 대응 또한 북한이 조장한 이런 상황에 우리가 휘둘리고 이끌려가는 것이 되고 만다. 쉽게 동요하지 않는 차분한 마음으로 대화에 임하되 그들의 강경한 말들 뒤에 숨어있는 공포와 그 원인들까지 깊이 통찰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혜민 스님 미 햄프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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