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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27) - 칼 야스트렘스키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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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그리고 1975년, 레드삭스는 다시 강자로 부상하며 지구 챔피언 자리에 강력히 도전하였다. 프레드 린과 짐 라이스, 드와이트 에번스 등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외야진이 팀의 타격을 이끌었고, 루이스 티안트와 릭 와이즈 등이 투수진을 지탱해 주었다. 야스는 8년 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던 것과는 달리, 이 해에는 팀의 구심점 역할에 머물렀다. 그의 이 해 성적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9월 중순에 라이스가 투구를 손에 맞고 부상을 당하여, 좌익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 결국 대럴 존슨 감독은 야스에게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레드삭스는 오리올스를 따돌리고 동부지구 정상에 섰지만, 시즌 내내 1루수로만 활약했던 야스를 좌익수 자리에 둔 채 포스트시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은 보스턴 팬들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더구나 서부지구 챔피언 애슬레틱스는 월드시리즈 4연패에 도전하는 당대 최강팀이었다.

그러나 리그챔피언십시리즈가 개막되자, 팬들의 걱정은 기우로 드러났다. 야스트렘스키는 시리즈 1차전에서 빌리 윌리엄스의 결정적인 타구를 잡아냈으며, 2차전에서는 샐 반도가 '그린 몬스터'를 맞추는 큰 타구를 날린 상황에서 3루로 쇄도하던 버트 캄파네리스를 정확한 송구로 아웃시켰다. 또한 3차전에서도 잘 맞은 레지 잭슨의 타구 두 개를 멋지게 처리했다. 또한 시리즈를 통틀어 11타수 5안타를 기록하였으며 2차전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렸다.

결국 레드삭스는 애슬레틱스를 누르고 8년만에 다시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 당대 최강의 타선을 자랑하던 신시내티의 '빅레드머신(Big Red Machine)'과 접전을 벌인 끝에 패퇴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야스트렘스키는 1976년과 1977년에도, 연속으로 100타점을 돌파하는 등 30대 후반의 나의를 무색하게 하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1977년에는 통산 일곱 번째로 리그 외야수 중 어시스트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 해에 마지막으로 골드글러버가 되었다.

1977년에 안정된 전력에도 불구하고 양키스에 지구 우승을 양보했던 레드삭스는, 1978시즌 초반 짐 라이스와 데니스 에커즐리 등을 앞세워 폭발적인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한때 레드삭스에 14.5 경기나 뒤져 있던 양키스는 후반에 대추격전을 전개하였고, 결국 양팀은 예정된 162경기를 모두 99승 63패로 마감하였다. 그리하여 펜웨이파크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는 40대의 문턱에 다다른 보스턴 야구의 영웅에게 지울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을 남겨 주었다.

레드삭스는 경기 초반에 야스트렘스키의 홈런 등으로 2점을 선취하였다. 7회 초에 양키스가 두 명의 주자를 내보냈지만, 다음 타자는 양키스 주전 선수 중 가장 타력이 부실한 유격수 버키 덴트였다. 그가 파울타구로 자기 다리를 맞추자, 부상을 우려한 양키스의 밥 레먼 감독은 그를 교체하려는 생각을 했으나 마땅한 유격수감이 없어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이크 토레스가 다음 투구를 한 순간, 덴트의 배트가 돌아갔다. 공은 야스트렘스키의 머리 위로 날아가, '그린 몬스터'를 훌쩍 넘어갔다.

3 대 2로 앞서게 된 양키스는, 레지 잭슨의 홈런 등으로 2점을 더 뽑았다. 레드삭스는 8회에 야스트렘스키의 안타 등으로 간신히 2점을 만회하여 스코어를 5대 4로 만들었고, 9회말에 주자 두 명을 내보내어 역전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야스트렘스키는 2사 1-3루의 절박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야스트렘스키가 양키스의 에이스 구스 가시지의 공에 배트를 댄 순간, 그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배트는 가시지의 강속구에 여지없이 밀렸던 것이다. 공은 힘없이 솟아올라, 양키스의 3루수 그레익 네틀스의 글러브에 안착했다. 그것이 레드삭스의 1978시즌의 마지막이었다.

뼈아픈 패배를 맛본 야스트렘스키는, 1979년에 두 개의 대기록을 수립하여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7월 24일에 애슬레틱스의 마이크 모건을 희생양으로 하여 통산 400호 홈런을 뽑은 데에 이어, 9월 12일에는 양키스의 짐 비티를 상대로 통산 3,000호 안타를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의 3,000안타 클럽 가입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해 친지들을 며칠 동안 보스턴에 머물게 했을 정도로 이 영예로운 업적에 대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까지 400홈런과 3,000안타를 모두 돌파한 선수는 스탠 뮤지얼과 행크 에런, 윌리 메이스뿐이었다. (후에 에디 머리와 데이브 윈필드, 칼 립켄 주니어가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특히 아메리칸리그에서 이 업적을 남긴 선수는 야스트렘스키가 처음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기록 수립 직후 펜웨이파크로 직접 전화를 걸었고, 시즌 후에는 야스트렘스키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축하 행사를 갖기도 했다.

야스트렘스키는 40대에 들어선 뒤에도 레드삭스의 정신적 지주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1983년까지도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고, 팬들은 그의 퇴장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팀이 자신에게 떠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1983년 10월 1일, 레드삭스는 이 날을 '야즈 데이(Yaz Day)'로 지정하여 이 위대한 선수의 업적을 기렸다. 그리고 정규시즌 마지막 날인 다음날, 시즌 들어 처음으로 야스트렘스키는 선발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이 경기가 끝나면 그의 커리어는 역사 속에 파묻히게 되어 있었다.

팬들은 이 노쇠한 영웅의 마지막 경기 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경기 후, 펜웨이파크를 한 바퀴 돌며 눈물을 흘리는 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것이 선수 야스트렘스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야스트렘스키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을 얻은 1989년, 예상대로 자니 벤치와 함께 쿠퍼스타운에 입성했다. 그는 헌액 기념 연설에서, 자신이 전당 멤버가 된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나는 신에게서 훌륭한 자질을 선물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그리고 두 배는 더 많이 노력했다."

그보다 더 훌륭한 설명은 있을 수 없었다.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Carl Michael Yastrzemski)

- 일명 "Yaz", "Captain Carl"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지명타자
- 우투좌타
- 1939년 4월 11일 뉴욕 주 사우샘턴에서 출생
- 1961 ~ 1983년 보스턴 레드삭스
- 통산 성적 : 타율 .285, 출루율 .379, 장타율 .462, 452홈런, 3419안타, 1844타점
- 명예의 전당 헌액 : 1989년 (BBWAA)

남상웅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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