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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해외탈세 숨바꼭질 ‘게임오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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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세계 부호들의 탈세와 은닉재산 장소로 잘 알려진 조세피난처(tax haven)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U)가 지난 4일 중남미 카리브해의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재산을 숨겨온 세계 유명인사들의 명단 일부를 폭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이고리 슈발로프 러시아 제1부총리의 아내, 필리핀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딸 이멜다, 스페인의 유명 예술품 수집가인 티센 보르네미자 등이 그들이다. 협회에 따르면 인구 2만에 불과한 버진아일랜드에는 조세 회피를 목적으로 설립된 유령회사가 최소 12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후폭풍은 한국에까지 밀어닥치고 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는 조만간 명단을 추가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추가 명단에 한국 내 고위관료나 기업인의 이름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마침 박근혜정부는 복지공약의 재원 확보를 위해 ‘지하경제 양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국세청은 버진아일랜드 명단에 한국인이 포함돼 있는지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세 등 위법 혐의가 확인되면 철저히 추징할 방침이다. 기획재정부도 발 빠르게 나섰다. 지난 7일 ‘정부는 2011년 5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ritish Virgin Islands)와 조세정보교환협정에 가서명했으며 현재 발효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그간 조세피난처에 대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0년 5월 국세청은 해외 조세피난처 등에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기업자금을 불법 유출한 4개 기업과 사주를 적발했다. 당시 이들이 탈루한 소득은 6000억원이 넘었다. 적발된 업체는 제조업·금융업·도매업·무역업 등 다양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당시 제조업체 사주 A씨는 해외에 설립한 현지법인과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 매출단가를 조작하거나 용역대가를 허위로 지급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스위스의 비밀계좌에 숨겼다. A씨는 이 돈을 5~7단계에 걸쳐 세탁한 뒤 버진아일랜드·라부안 등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국내외에 재투자해 얻은 소득을 빼돌렸다. 그는 또 세금을 내지 않고 자녀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기 위해 조세피난처에 있는 신탁회사를 이용하기도 했다. 서비스·투자자문사 사주 B씨는 제3국을 경유한 옵션 거래로 자회사가 소유한 주식을 원가보다 싸게 산 뒤 해외에서 팔아 차익을 빼돌렸다.

 한계도 있었다. ‘구리왕’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차용규씨는 2011년 7월 1600억원대 세금을 통보받았다. 국세청은 차씨가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국내 부동산에 투자하는 등 사실상 국내에 거주하면서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차씨는 지난해 1월 열린 과세 전 적부심사에서 ‘차씨가 국내에 거주하는 일수가 1년에 약 1개월에 불과해 국내 거주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게 됐다.

 어쨌든 조세피난처를 통한 탈세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이 2009년부터 세계 주요 조세피난처와 조세정보 교환협정 체결을 추진해온 덕이다. 그간 협정을 체결한 조세피난처는 모두 17개국이다. 쿡아일랜드·마셜제도와는 이미 협정이 발효됐다.

 재정부 류광준 국제조세협력과장은 “재정부에서는 조세정보교환과 관련한 절차를 끝내고 외교부에 서명과 같은 후속작업을 넘겨준 상태”라며 “이르면 1년 안에도 조세피난처 17개국 모두와 협정이 발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세피난처 국가와 정보교환협정을 하게 되면 피난처 국가에 페이퍼 컴퍼니를 둔 기업의 ▶사업자등록에 관한 사항 ▶기업 소유권 정보 ▶회계 정보 ▶개인 또는 기업의 금융거래 정보를 알 수 있게 된다. 또 조세피난처에서 탈세 혐의자를 면담하거나 장부조사를 하는 사실상의 해외세무조사도 할 수 있다. 협정을 맺은 국가의 세무조사에 참여하는 것을 요청할 수도 있다. 기대효과는 적지 않다. 조세피난처에 숨겨둔 자산과 소득을 적발하는 데 필요한 정보 수집이 가능해진다. 또 해외에 진출한 고소득자나 대기업, 국내 진출한 외국인 투자기업의 역외 탈세거래도 적발·추징할 수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의 유력한 수단이 생기는 셈이다.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는 2000년 이후 강화되는 추세다. 그레나다·바하마 등 세계 주요 조세피난처 35곳은 2000년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한 ‘정보교환기준’을 준수하기 위해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세계 각국은 이를 바탕으로 조세피난처와 조세정보 교환협정을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조세피난처’라는 단어는 국가 간 공식용어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다.

세종=최준호 기자

조세피난처(tax haven) 법인의 소득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을 말한다. 모든 금융거래의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에 탈세와 돈세탁용 자금거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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