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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화 사회…수익보다 안정적 현금흐름 중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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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호 20면

자본시장과 생명보험시장의 고민이 다르다. 증권사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지점도 줄고 있다. 자산운용사는 자금이 빠져나가 적자를 보는 곳이 30%를 훌쩍 넘어선다. 보험사는 저금리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리스크를 고민한다. 돈은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를 운용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전자는 거래가 줄어들고 자산도 유출되는 데 반해 후자는 많이 들어오는 돈 때문에 골치인 것이다.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금융시장의 연금화가 있다. 연금화란 종신연금이나 월지급식 등을 모두 포괄한 개념이다. 매달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오는지 계산이 가능하게 일정한 현금흐름을 원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 등의 전통적 연금뿐만 아니라 연금복권·주택연금 그리고 월지급식 펀드 등이 해당된다.

이런 수요는 계속 증가한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주식펀드는 56조원이 줄었지만 국민연금과 사적연금은 300조원이 증가했다. 주택연금은 약 16조원이 증가해 2008년에 비해 금액으로 보면 무려 12배가 증가했다. 월지급식 펀드도 2011년 9000억원에서 2012년에는 3조원으로 늘었다.

연금화 사회를 가져온 원동력은 급속한 고령화와 베이비 부머의 규모다. 수명이 연장되면 연금 수요가 증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꺼번에 수명이 늘어나는 베이비 부머의 숫자가 너무 많다. 2010년에 1000만 명이던 베이비 부머가 2040년에는 2400만 명으로 1400만 명이 증가한다. 55세 이상의 사람만 모여 사는 부산만한 도시가 앞으로 30년 동안 4개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다. 연금화 사회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금융시장도 색다른 패러다임에 접어든다.

일러스트 강일구

거액 자산가, 사모펀드 이동 주목
우선 자금의 파이프라인이 변한다. 기존에는 거액이든 소액 고객이든 간에 모두 공모펀드(투자자를 공개적으로 모집)에 돈이 몰렸다. 공모 주식펀드 성과가 월등히 높은데 다른 자산들을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인구 구조상 30, 40대가 주류를 이루는 시점에서 이들의 자산 축적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점도 공모펀드 인기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이제는 연금시장과 거액 고객시장 두 개의 파이프라인으로 양극화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연금에 돈을 넣고 나면 여유 자금이 별로 남지 않아 자산관리를 위탁하기가 쉽지 않다. 가계부채, 저성장으로 인한 소득 감소, 물가 인상에 따른 비용 부담으로 연금을 불입하고 나면 돈이 별로 남지 않는다.

거액 자산가들은 사모펀드나 투자자문 등을 중심으로 하는 맞춤 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외환시장도 표준화된 선물환 시장은 소액 투자자들이 거래하고 거액 투자자들은 장외시장에서 맞춤식으로 거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도 공모펀드는 퇴직연금 등에서 돈이 주로 들어오고 거액 자산가들은 헤지펀드 같은 사모펀드를 찾는다.

둘째, 자산 구성이 안정적으로 변한다. 연금자산을 굴릴 때는 자산 배분을 보수적으로 하는 게 특징이다. 국민연금은 주식 비중이 27% 정도다. 퇴직연금이나 연금저축은 금리를 보장하는 채권성 자산의 비중이 90%를 훌쩍 넘어선다. 이렇게 되면 전체 자산시장의 안전자산 비중이 커진다.

연금의 부채 듀레이션(채권에서 나오는 현금흐름을 현재 가치화한 것)을 맞추기 위해 외국에서는 긴 듀레이션의 채권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최근 저금리 현상에 대해 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과 저성장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연금펀드의 성장과 함께 리스크 관리를 위해 장기채권을 편입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셋째, 저금리와 자산축적의 악순환 고리에 접어들 가능성도 커진다. 금리가 낮아지면 노후를 위해 준비해둔 금융소득이 줄어든다. 금리가 3% 이하로 낮아지면 이 강도가 더 강해진다. 결국 노후에 필요한 금융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금융자산을 축적해야 한다. 금융자산 축적은 다시 채권 수요를 증가시켜 금리가 하락하고 다시 금융자산을 더 축적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저금리가 고착화하므로 상당히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저금리가 낳는 자산축적 악순환 피해야
일본은 이런 상황을 겪고 나서 해외 투자에 나서면서 자산 다변화를 했지만 때가 늦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복기를 해보면 ‘일본이 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막연히 ‘내년에는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 일찍 해외로 자산을 다변화하든지 다양한 자산군에 편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적립시장에서 인출시장으로 이동한다. 적립시장은 여전히 있지만 기존에 크게 부각되지 않던 인출시장이 부상한다.

적립시장과 인출시장은 메커니즘이 완전히 달라 주의해야 한다. 적립시장은 보다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리스크를 감수해도 되지만 인출시장에서 한두 번의 투자 실패는 만회하기 어렵다. 전자는 투자수익이, 후자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종신이나 일정한 기한을 두고 연금이나 월지급식으로 인출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인출할 것이며 보유한 자산을 어떻게 운용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를 잘못할 경우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자산이 고갈되는 은퇴파산에 이를 수 있다. 은퇴 이후에는 ‘건강할 때까지 사는 게 아니라 돈이 있을 때까지 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투자자문·신탁·사모펀드가 증가하고 중수익·중위험 상품, 월지급식 펀드, 그리고 해외상품들이 잘 팔리는 것은 연금화 사회로 이행하는 전조 단계다. 연금화 사회는 앞으로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피할 수 없는 큰 흐름이다. 1, 2년에 끝나지 않고 20년 이상 지켜갈 화두다. 소비자나 금융기관이나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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