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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산업, 공장은 커졌지만 기술 수준은 제자리”

중앙선데이

입력

기계공학 박사인 배순훈 S&T중공업 회장은 대우전자 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거쳐 일흔에 전공인 기계 분야에서 다시 일한다. 배 회장이 제품 전시실을 돌아보고 있다. [사진 S&T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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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훈(70)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요즘도 가끔 수학책을 펴놓고 문제를 푼다고 했다. 무엇보다 문제풀이가 치매를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란다. 치매를 걱정했지만 5일 경남 창원의 S&T중공업 회장실에서 만난 배 전 장관은 젊은이 못지 않았다. 한국 기계공업의 미래와 후배 연구원을 걱정하는 목소리에선 학자의 모습이 느껴졌다. 충북 청주에 있는 노후화된 연초제조창을 미술관으로 바꾸는 작업을 열심히 설명할 때는 꿈을 좇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와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대우전자 회장, 정보통신부 장관, 대통령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굵직한 자리를 여럿 거쳤다. 대우전자 시절에는 ‘탱크주의’ 광고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달 초에는 S&T중공업 회장에 취임했다. 회장 사무실은 회사 본관이 아닌 연구개발(R&D)센터 내에 있다. 20㎡(약 6평)나 될까 싶은 작은 방이다. 연구원들과 가까이 있고 싶어 본관이 아닌 연구개발센터에 회장실을 뒀다고 했다.

-S&T중공업 회장 취임은 뜻밖이다.
“내가 먼저 S&T그룹 최평규 회장에게 회사일을 돕고 싶다고 제안했다. 다행히 최 회장이 응낙해 이 자리에 앉았다. 지난해 11월 S&T중공업에서 연구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젊은 연구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도울 수 있었으며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전공이 기계공학 아니냐.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원자력 담당 전무도 했었다. 알고 보니 최 회장과는 오랜 인연이 있더라. 사실 나는 기억을 잘 못하는데, 1975년인가 미국에서 돌아와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할 때 최 회장이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최 회장은 대학 졸업하고 냉동회사에서 기계부품 담당하는 일을 했고 학교에 찾아와 몇 번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회장 되기 전에도 일 때문에 만난 적은 한두 번 있다.”

-기계산업에 어떤 문제가 있어 돕고 싶다고 했나.
“우리 기계산업은 공장이 커지고 생산은 많아졌지만 예전에 비해 기술적으로 나아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더라.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는데 미래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S&T중공업은 K-2전차의 파워 트레인(동력전달장치) 등을 생산하는 민간 방산업체다. 전면전에서는 첨단무기가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단기 테러전에선 고성능의 재래식 무기가 중요하다. 아직은 S&T중공업 발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지만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현장 인력들과 힘을 합치면 가능성이 있다. 창원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 내려와 연구개발, 경영 현황 등을 살필 계획이다.”

-기업인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창조경제는 어떻게 보나.
“창조경제란 복잡하고 광범위한 개념이다. 산업 간 융ㆍ복합을 하고 정보기술(IT)과 접목하면 거기에 미래가 있다는 것인데 중요한 건 누가 무엇을 하느냐, 구체적인 일자리와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먼저 사람들이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정보통신부 장관 시절 초고속통신망 사업을 추진할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그걸 왜 하려 하고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한 기억이 있다. ‘전북 정읍에 사는 원씨 할머니가 유기농으로 재배한 농산품을 백화점에서 팔리는 것보다 세 배 비싼 값에 팔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지방에 있는 가난한 학생이 통신망을 통해 돈 안 들이고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관련 산업도 발전합니다.’ e-커머스, e-러닝에 대한 설명이었다.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큰 틀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구체적인 방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통부 장관 시절 의원인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을 텐데.
“박 대통령은 정보통신에 관심이 많았다. 1998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정보고속도로 사업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는데, 이번에는 박 의원께서 정보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후 자세히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미래창조과학부가 만들어졌지만 정보통신부 단독 부처가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로 누가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최시중 위원장이 이끄는 방송통신위원회의 힘이 강해 관련 정부 부처가 힘을 별로 못 쓴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정통부 단독 부처는 없지만 실제 미래창조과학부가 어떻게 운용되느냐가 중요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자주 보나.
“김 회장이 해외에 나가실 때는 신원보증인이 필요한데, 내가 그중 한 명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뵙는다. 얼마 전 김 회장의 생일 모임에서 만났다. 건강은 몇 년 전보다 많이 좋아지셨다. 이런 말씀하시더라. ‘왜 젊은 친구들이 가만히 들어앉아 있느냐. 골프를 쳐도 매일 하면 재미가 있겠느냐. 일을 하면서 골프를 쳐야 재미있다. 우리가 언제 시키는 일을 했느냐. 일을 찾아서 했지. 스스로 열심히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대우전자 시절을 비롯, 가까이서 본 김우중 회장은 어떤가.
“늘 나보다 한 수 위에 계신 분이다. 일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85년 봄인가 미국에서 MIT 교수가 되느냐 마느냐 고민하던 어느 날, 김 회장님한테 전화가 왔었다. ‘여기 새벽이니 나중에 얘기하시자’라고 좀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 중동 어디라 하시면서 ‘여긴 낮이야. 내 말 좀 듣고 다시 자. GM과 합작으로 한국에 부품회사를 만드는데 당신이 필요하니 한국에 와 줘야겠어’하시더라. GM과의 합작사 설립은 내게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MIT 교수 포기하고 들어왔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취임 땐 비전문가 논란도 있었다.
“어느 미술관장 아래에서 큐레이터들이 가장 좋았느냐고 물어봐라. 나는 큐레이터들에게 일을 믿고 맡겼다. 미술관 직원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힘썼다.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미술 하는 사람과 결혼했다. 지금은 관장 자리를 내놨지만 청주에 있는 낡은 연초 제조창을 미술관으로 바꾸는 작업을 돕고 있다. 이게 잘됐으면 좋겠다. 청주 연초공장은 널찍하고 층고가 높아 미술관으로 꾸미면 세계적 전시 공간이 될 수 있다.”(※배 회장의 부인은 서양화가 신수희씨다. 조달청은 올해 초 청주 KT&G 연초제조창을 리모델링해 ‘국립미술품 수장보존센터’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배 회장은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 정부와 청주시가 연초제조창을 문화공간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간 굵직한 자리를 여럿 맡았다.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나.
“일들이 모두 달라 보지만 다 같은 것이다. 기업이건 정부 부처건 미술관이건 사람과 사람이 같이 일하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걸 아는 게 중요하다.”

창원=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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