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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역사의 고향 (60)실상사의 신라대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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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종 구 산문 제일의 거찰>
아직 동이 트기까지는 멀다. 미명 어둠 속을 자동차는 달린다. 남원에서 아흔 아홉 굽이, 산허리 고개를 타고 구름인지 안개인지 그런 희뿌연 내 속을 오르느라 면 하늘 끝이 닿는 고갯마루에 운봉은 있었다.
운봉에서 인월까지는 펑퍼진 고원을 간다. 인월에서 계류를 따라 바른편으로 꺾어 들면은 아득히 중천에 반야봉과 천왕봉의 언저리가 보라 빛「실루엣」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비에 불어난 개울물은 여울목에서 제법 소리내어 흐르고 그 너머로 천년 고찰은 적요히 지리산 품에 졸고 있었다.
방장산 실상사(전북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는 신라 선종 구산문의 으뜸인 거찰 이었다.
일찌기 입당하여 서당지장의 심법을 얻고 흥덕왕이 위에 오를 무렵 귀국한 홍척 국사 개창(서기828년)의 절이다. 홍척 국사가 지리산 깊숙이 머무르자 흥덕왕의 선강태자가 먼저 귀의하였고 그 문하에는 일세의 대덕 편운을 비롯하여 법제자만도 천여인을 헤아렸다. 사람의 자취가 드물어 계견성을 들을 수 없는 심산 속에 당탑은 드높은 신심인양 치솟고 가람은 드넓은 자비인양 단청도 질펀히 들어서게 되었다.
가히 해동선종의 초조로 우러름을 받던 홍척 국사의 도장 임직한 청정한 은성을 누렸을 것이다. 그 신라 성대의 자취와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 제행 무상.
비록 천년의 법 등을 오늘 토록 이어왔다고는 하나 지난날 모습은 봄 풀밭에 서로 바라보고 선동서 양 탑을 남겼을 뿐, 찾을 길이 바이없다. 진광전, 약사전하여 몇 법당이 오랜 비바람에 낡아 덩그렁 서 있을 뿐, 울도 담도 없는 경내에는 여기저기 덧없는 초석들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종신 5분의1 잃은 파종>
날은 훤히 밝았다. 푸르디푸른 녹청을 입은 신라대종은 황량한 경내 외진 한 모퉁이에 놓여 있었다. 가랑잎과 봄풀이 함께 있는 땅바닥에 놓인 종의 모습에 동대 박물관장 황수영 교수와 전 부여박물관장 홍사준씨는 먼발치에서 서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우리 나라에서 네 번째로 여기 그 모습을 보인 실상사의 신라 종은 종신의 5분의1을 잃은 파종이었다.
가슴 두근대며 천리를 치달아 온 심사는 완호한 신라 종을 기대하였음에서였다. 해방 후 한때 잠깐 현신 했다가 뜻 아닌 화재로 산산조각이 났던 애장 왕 5년(서기 804년) 주조의 선림원 종을 잃은 아쉬움을 이 종에 걸었던 것을.

<연화입 판으로 된 둥근 당좌>
나락과 같던 실망의 발길은 한 걸음 한 걸음 종으로 다가서면서 조용한 환희로 번진다. 푸르른 녹청 바탕에 높이 44「센티」로 되도록 양주 된 한 쌍의 비천 이며, 연화 입판으로 된 지름 22「센티」의 둥근 당좌와 아래위를 연주 문으로 싸고 그 사이에 당초 문을 두른 다음 네 곳에 당좌형 원문을 놓은 완전한 하대, 그 어느 하나 우리 미술사의 머리를 차지할 아름다움 아님이 없다.
고철을 줍는 두 청년의 무심한 탐지기에 의해 경내 동북간 종각으로 전승되어 오는 자리에서 찾아진 현이고 95「센티」의 종이 봉덕사종 다음갈 신라하대의 통식을 갖춘 사찰창건 당시의 대종임은 쉬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종이 어느 때 어떤 사연으로 불타게 되었는지, 그 기구한 연유를 지금에 밝힐 길은 없다.

<이조 토호 억불의 희생>
삼남을 휩쓴 임진왜란의 소이인지, 이조토호들의 억불의 희생이었는지, 아니면 어느 시기의 실화로 인함인지, 이미 그럼 직한 신운을 거둔 종은 말이 없고 아기모습의 두 비천도 안타까운 세속의 사연에는 아랑곳없이 소신공양의 법열에 젖은 양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웃는 듯 마는 듯 그런 가녀린 웃음을 띤 비천의 꽃다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종은 지난 성대를 일깨워, 신라오악의 남악으로 숭앙되던 지리영봉 봉우리마다 웅혼한 여운으로 은은히 울려 퍼지는 듯도 하다.
우려한 연화좌위에 두발을 피고 상반신을 비스듬히 마주앉은 비천. 따스론 살결이 꿰 보이는 여린 천의로 몸을 감고 하나는 다소곳이 고개 수그려 합장하듯 생을 불고, 하나는 갸웃이 고개 기울여 날렵한 손으로 지공을 짚으며 횡적을 분다.
창고한 녹청바탕 깊은 전설 속에 묻혀 허공을 향해 생과 횡적의 표표한 가락을 불면 수륙공 삼계를 떠돌던 외로운 넋들도 왕생극락의 기쁨을 누렸으리라. 묘음가락에 어려 연화좌 송이송이 꽃잎은 그윽한 향내를 풍기고 그 아래 서운도 머흐르는데, 천의자락도, 오색영롱한 영락도, 법계의 기쁨인양 일진 바람에 하늘로 하늘로 나부낀다.
아침 햇살은 퍼진 대로 퍼졌다. 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다는 젊은 승은 합장하며 아침 공양 들기를 재촉한다. 이것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의 재촉이다. 누덕누덕 기웠을 망정 깨끗한 납의에 맨발인 그는 찬은 없다고 조반 들기를 권할 때마다 민망해 했지마는 실측과 촬영에 바쁜 황 교수나 척본하는 손길 쉴 겨를이 없는 홍 전 부여박물관장은 그렇게 하마고 말로만 답할 뿐 좀체 일손을 놓으려들지 않는다.

<국가적 발견>
여느 때 말이 적은 황 교수는 실상사 종의 발견은 국가의 경사라 하며 흥분했고, 홍씨는 그대로 이토록 아름다운 상호는 처음이라고 기뻐한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거니와 이때 황 교수가 찍은 사진은 「필름」이 헛돌아 한 장도 찍힌 것이 없었으니 가히 그 마음을 알만도 하다.
대웅전 쪽에서 낮 예불 소리가 들려온다. 느린 송경과 그 사이사이를 잇는 목탁의 구성진 소리. 어느덧 낮때가 된 모양이다. 두 손길은 아직도 바쁜데 산사 뜰에는 산수유 꽃이 어스럼 밤의 밤 무리처럼 고목 된 등걸에 피어 있었다. 글 예용해 사진 김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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