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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공직자 해외계좌 폐쇄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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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블라디미르 푸틴(사진) 러시아 대통령이 공직 사회의 부패 관행에 일침을 가하고 나섰다. 해외 계좌를 폐쇄하지 않을 경우 면직하도록 하는 법령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특히 자산을 국외로 빼돌려 부를 축적해 온 고위 관료층을 노린 조치로 해석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일(현지시간) 푸틴이 3개월 안에 해외에 있는 은행 계좌를 포함해 펀드나 주식 등 역외 자산을 처분하지 않는 공직자는 면직할 수 있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대통령령은 오는 7월 1일 모든 공무원이 자신의 수입과 자산을 신고하도록 의무화했다.

 신고 대상에는 해외 부동산도 포함된다. 해외 부동산의 경우 소유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취득 과정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상세히 입증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 법령은 국영기업 임원들에게도 적용된다고 FT는 전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크렘린 행정실장은 “누구든 금지된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지면 즉각 해고할 것”이라며 “누구도 이 법을 피해갈 수 없고, 예외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고 리아노보스티통신 등은 전했다.

 이번 조치는 큰 틀에서는 국부의 해외 유출을 막아 러시아 경제의 건전성을 회복하겠다는 푸틴의 정책기조에 따른 것이라고 FT는 설명했다.

특히 최근 키프로스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러시아 엘리트층이 해외에 묻어 놓은 검은 돈이 부각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중앙은행은 지난 2월 “불법적으로 해외로 흘러간 자산은 지난해 한 해 동안만 500억 달러 상당”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부패와의 전쟁 역시 푸틴이 지난해 5월 임기를 시작할 때부터 내세운 기치 가운데 하나다. 2011년 실시된 총선과 지난해 대선에서 선거 부정 등 논란이 일면서 중산층을 중심으로 반푸틴 시위가 확산되는 등 전에 없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되자 내놓은 자구책 가운데 하나였다. 러시아는 2012년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서 174개국 가운데 133위의 하위권에 머물렀다.

 푸틴은 지난해 12월 국정연설에서도 “국가의 책임성이라는 것은 슬로건이나 연설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국민이 정부가 투명하다고 느낄 때에야 비로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행정부는 이에 따라 곧바로 고위 공직자의 해외 자산 보유를 제한하는 법안 두 건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 두마(하원)에서 몇 달째 법안들을 제대로 심리조차 하지 않고 처리를 미적거리자 보란 듯이 직접 대통령령을 들고 나온 것이다.

 특히 푸틴이 이날 서명한 대통령령은 의회에 제출한 법안보다도 훨씬 규제 수위가 높다. 로이터는 “골자는 같지만 기존 법안은 러시아 은행을 통한 해외 은행 계좌 개설은 허용했던 데 비해 대통령령은 계좌 보유 자체를 금지한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국영기업 경영진을 규제 대상에 포함하는 것 역시 기존 법안에는 없던 내용이다.

 이를 두고 푸틴이 고위 관료들이 부패했다고 비판하는 국민 여론을 의식해 자신의 이미지 개선용으로 법령을 내놓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또 이는 그가 3선에 성공한 뒤 통치력 강화를 위해 줄곧 애국주의를 고취하려고 노력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조치라는 해석도 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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