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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신>「검소에서」 「멋」으로 - 황산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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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을 떠나 강행군으로 26시간을 달려 이곳 서독 수도 「본」에 도착하니 여기에는 벌써 개나리꽃이 만발해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약10일쯤 계절이 빠른 셈이지만, 그러나 날씨는 매우 쌀쌀하다. 독일에서도 금년에는 한 달쯤 계절이 빨라져 벌써 4월의 기후가 되었다고들 한다. 독일에서 「아프릴베터」(Aprilwetter 4월의 기후)라고 하면 「처녀의 변심」을 가리키기도 한다지만 과연 지금의 독일 기후는 참으로 변덕스럽다고 하겠다.

<여자는 짙은 화장>
나는 5년전에 독일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제 다시 이곳을 찾고 얻은 첫 인상은 그간에 독일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굉장히 높아졌다는 점이다. 미국의 「슈퍼·마키트」에 해당하는 「가우프호프」(Kaufhof)가 세워졌고 언제나 손님들로 붐비고 있다.
독일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곧 「검소」를 연상하지만, 이것은 이미 옛말이 된 것 같다. 여자들은 대개 짙은 화장을 하고 있고,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실용적인 것만을 찾던 옛 습성을 버리고 이제는 제법 「멋」을 부리려고 하게 되었다. 고급상품은 상점마다 산더미같이 쌓여있고, 고객은 줄을 지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그런 탓인지 물가는 5년전 보다 상당히 높아진 것 같다.

<정군에 「법박」학위>
3월 10일 「본」에 도착하자 나는 두 개의 기쁜 소식에 접했다. 3월 9일에는 건국대학교의 김성배 교수가 여기에 와서 4년 반만에 소년범죄에 관한 논문으로 「쾰른」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이 결정되었고, 그리고 3월 10일에는 서울법대를 나와 「본」대학의 「벨젤」교수의 밑에서 연구하던 정종욱군이 「라드브루흐」의 상대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두 개의 법학박사 학위가 한국의 소장학자에 의하여 취득된 것인데, 특히 정군의 경우는 평점이 「우」(magna cumlaude)로 되어 있으므로 논문출판 비용을 대학에서 전담하기로 되어 있으며, 종전후 독일에서 박사가 된 외국인 중에서는 최고점을 땄다고 주심 「벨젤」교수는 정군을 극구 찬양하고 있었다. 「벨젤」교수 문하의 귀재 「슈라이버」박사는 최근에 법의무에 관한 저서를 냈지만, 그 속에서 벌써 정군의 논문을 인용할 정도로 정군은 지금 독일학계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다고 하니 한국 사람으로서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형법학계에 새 조류>
지금 독일의 형법학계를 통틀어 평한다면 소장학자들에 의한 「벨젤」비판이 하나의 큰 조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벨젤」자신도 약20년 전에는 「리스트」나 「메츠거」와 같은 노대가를 비판·공격하면서 자신의 목적적행위론을 세워 나갔지만 세월은 흘러 이제 그는 반대로 공격대상에 오른 노대가가 된 것이다. 특히 「괴팅겐」대학의 젊은 학자인 「록신」이 교수자격 청구논문을 발표함에 있어서 「벨젤」의 학설을 건설적으로 비판한 것은 여기에서 크게 화제에 오르고 있는데 「벨젤」자신도 강의시간에 「록신」의 이 저서를 교재로 사용하면서 학생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학문은 혼자서 못해>
작년 4월에 한국을 방문했고, 또 작년 여름에 유기천씨 부부를 「본」에서 만난 일이 있는 「벨젤」교수는 한국 법학계와 일본 법학계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학자는 좀 더 단결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학문이라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학자들의 업적위에 그 전당은 세워지는 것이며 자기와 학설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배척한다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벨젤」교수는 자기를 호되게 비판한 「록신」의 저서를 교재로 사용하기까지 하고 있다. 자기와 학설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와 전공과목을 같이 하기만 해도 그를 백안시하고 기회만 있으면 학계에서 매장시켜 버리려고 노리는 우리 한국의 실정에서 보면 부럽기 짝이 없는 기풍이라고 하겠다.

<부인과 고급 포도주>
「본」에 와서 지금까지는 대학 당국자의 공식적인 초대외에 이곳 대사관의 직원과 한국 학생들로부터도 계속 초대를 받았다. 특히 두 사람의 박사가 탄생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들의 발길은 술집으로 향해졌으며 나에 대한 환영과 두 박사에 대한 축하의 술이 밤늦게 까지 오고 갔다. 한국 사람이 자주 가는 술집으로서는 「호프브로이」(Hofbrau)라는 맥주「홀」과 「알테·후트」(Alte Hut·고모)라는 막걸리집형의 술집인데, 특히 고모주점에는 이곳 부호들이 귀부인과 같이 와서 고급 포도주를 마시기로 유명한 곳이다. 워낙 호화로운 생활만을 하는 사람인지라 때때로 고색창연한 이런 곳을 찾아와서 촛불을 켜놓고 술을 마시는 것이 도리어 이색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 이곳의 명물은 「비너발트」(Wienerwald)라는 닭요리 전문집이다. 57년까지도 「뮌헨」에서 식당 「보이」노릇을 하던 「얀」이라는 사람이 이제는 「유럽」은 물론이요 미국에까지도 3백가량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주가 되었고 자가용 비행기도 2대나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브라텐들」(Brathendl) 즉 닭 반마리를 전기에 구운 것에 「감자튀긴것」(pommes frites)을 합하여 우리나라 돈으로 2백50원 가량이면 먹을 수 있으니, 밤마다 손님들이 우글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필자. 성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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