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최초의 총리대신 도원 김홍집(하) - 유홍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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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청·일 교섭 성공>
수신사행을 통하여 국제정세에 가장 해박한 인물의 한사람으로 등장된 김홍집은 이러한 개화작업과정에서 주로 대외교섭관계를 담당하였었다.
귀국후 예조참판으로 승진된 그는 일제 판리공사 화방의질을 맞아 대일 현안의 해결을 전담하였고, 뒤이어 총리기무아문 당상, 경리통리기무아문사, 통상사 당상, 협판통리아문사무 등을 역임하면서 미·영·독과의 수호통상조규 체결에 참여하였으며, 임오군란 직후에는 복잡 미묘한 대일·대청교섭에 나서 이를 비교적 성공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곤란했던 중도파>
그러나 척족정권과 개화독립당과의 알력이 날로 악화되어 무력적인 정변(갑신정변.1884년)에까지 이르게되자,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던 그는 내정과 외교에 있어 난감한 처지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삼일천하의 혁신정권이 그에게 한성판윤의 감투를 배정하였는가 하면 복권된 척족정권은 좌의정 겸 독판교섭통상사무를 제수하여 일제와 정변후의 제반사를 협상케 하였고 또한 일찍이 그에게 이이제이를 교시(조선책략)하였던 청국이 정변을 통한 일제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새삼스러이 종주국의 보도를 빼어들고 대외교섭에 불연속선을 이룩하여 놓았던 까닭이었다.

<다시 중대사 맡아>
여기서 홀로 고심초사하며 사후수습에 임하는 시련을 맛본 그는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대일교섭에 일단락을 짓자, 곧 모든 직을 사하고(1884년11월) 판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홍집은 한동안 한가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으나, 1894년1월에 농민의 대반란(동학난)이 일어나자 다시금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안으로는 5백년 왕조의 기업이 뿌리째 흔들리고, 밖으로는 청·일 양군이 크게 밀려들어 국가의 명맥이 극히 위태롭게 된 까닭이었다. 특히 청국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농민반란을 구실로 하여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일제와의 교섭은 매우 난감한 것이었다.
총리교섭통상사무를 겸직하게 된 그는 일제와의 교섭에서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감행하려는 일제와의 협상은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 일제는 드디어 동년6월21일 미명에 풍도해상에서 청군함을 습격하여 청국과의 전쟁을 일으키는 한편, 연대병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강점하고 친일개화파를 중심한 신정부를 수립하고 말았다. 갑오경장으로 일컬어지는 일제의 군정체제가 이룩된 것이었다.

<결국 비극의 길로>
일제와의 교섭에 임하였던 김홍집은 크게 실망하였으나, 미약한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역행시킬 수 없는 시세의 흐름이었다. 그렇다고 사직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육진조약(1885년)때부터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하여금 조선의 정치안정을 취하도록 협력하자는 청·일 양국의 상의가 있었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여 왔던 까닭에 그는 끝내 경장관제의 실시에 앞서 조직된 최초의 내각에서 총리대신의 자리를 떠맡고야 말았다(1894년7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어갔던 최후의 비극은 이에서 더욱 재촉되었다. <문박·대구대학장><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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