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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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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자의 약자화는 한마디로 쓸 데 없는 일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효력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당국은 부질없이 공연한 일을 또 벌여 놓는다는 느낌이다. 한쪽에서는 「근대화」니 하는 얘기들을 꺼내면서 문자 정책만은 왜 그렇게 자꾸 뒷걸음질을 하려는 지 모를 일이다.
「약자계획」을 보면 문교부가 채택·사용하고 있는 상용한자 1천3백자 가운데서 획이 많고 복잡한 것을 줄여 쓴다는 얘기다. 그럴듯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약자」를 배우게 되는 것은 중등학교 이하의 학생들이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약자」에 낯설고 서투르고 하니 안 쓰게 될 것이다. 중등학생의 한자가 따로 있고 어른들의 한자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동양의 고전이나 바로 지금의 문헌들이 그 「약자」라는 것과 비슷한 한자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은 약자를 배우고 원 글자를 배워야 한자를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어쩌자고 괴로움을 겹겹이 씌워주려는가? 아이들은 지금 배우고 있는 상용한자라는 것도 겨우 절반이나 터득할까 말까한 형편이다. 이것은 최근 어떤 학자의 실증적인 실험에서 밝혀진 것이다. 실상 「약자」를 주장하는 사람은 「한자의 간소화」라고 하며 학생들을 동정하는 체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동정은 커녕 이중의 고통을 주는 효과 밖에는 없다.
일본의 경우를 들며 「약자」를 얘기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 왜냐하면 일본은 워낙 글자가 나빠서 그 글자만으로는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어려움이 전연 없다. 슬기로운 글자인 한글은 어느 모에고 쓸모가 있다. 중공의 약자를 또 가리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중공의 약자라는 그것은 우리나라의 이두 문자와 같은 것이어서 「표의」를 「표음」으로 바꾸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멋도 모르고 남의 뒤나 따라가자는 것은 유치한 원숭이의 짓이다.
당국은 「한글전용」을 오히려 늦추는 효과를 바란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한자의 약자화 같은 좀스러운 생각을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어려운 한자」를 약자로 고쳐 쓰려는 궁리보다는 그것을 바로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우리 문화를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주기 바란다. 목적 없는 일은 하지 않으니 만 못하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말이다. <한글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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