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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간부들도 “毛주석, 좌우 다스릴 능력 없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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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29면

1957년 7월에 열린 여산회의 전까지만 해도 펑더화이(앞줄 오른쪽)와 류샤오치(앞줄 왼쪽)는 사이가 좋았다. 고향도 같고 생각들도 비슷했다. 53년 5월 7일, 류샤오치·왕광메이 부부와 함께 중난하이(中南海)를 산책하고 있는 펑더화이·푸안슈(浦安修) 부부. [사진 김명호]

1959년 7월 2일 시작된 여산회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살벌했다. 폐막 1주일을 앞두고 리루이(李銳·이예)를 비롯한 젊은 층들이 마오쩌둥에게 제출할 의견서를 준비할 정도였다. “주석은 스탈린의 만년과 비슷하다. 천하를 통치할 능력은 감히 겨룰 사람이 없지만 좌우를 다스릴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비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말하기가 겁난다. 백 년 후에 태어날 사람들의 의론조차 용납하지 않을 기세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5>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당황했다.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를 불러서 단단히 일렀다. “젊은 수재들은 원래 그런 거다. 지들끼리 방구석에서 나눈 얘기다. 그런 것까지 문제 삼으면 일만 복잡해진다. 리루이를 뺀 나머지는 보호해라.”

8월 15일 밤, 여산회의 폐막을 하루 앞두고 마오쩌둥은 당 중앙위원들에게 쪽지를 보냈다. “비판은 엄하게 하되 처리는 관대하게 해라. 착오를 저질렀지만 펑더화이와 장원톈, 황커청, 저우샤오저우는 혁명성과 반동성, 양면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있다.”

다음날 마지막 회의에서 ‘군사구락부를 만들고, 외국과 내통한 펑더화이를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펑더화이는 군과 관련된 모든 직무를 정지당했다.

장원톈은 부인에게 “외교관이나 하던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경제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했다. 나라도 화가 났겠다”며 한바탕 야단을 맞았다. 사람들이 물으면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얘기했다. “내가 산에 오른 것은 우연이었다. 여산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발언을 했을 리가 없다. 평소 왕래가 없던 펑더화이와 이웃에 묵었던 것도 우연이다. 의견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 그건 필연이다.” 측근들에게는 “외국의 우수한 대학과 도서관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귀국 후 장정과 전쟁을 거치며 머릿속에 많은 것이 쌓였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의 총서기를 지낸 사람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내 의무”라는 말을 자주 했다.

8월 18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전군의 지휘관 1061명이 베이징에 운집했다. 국방부장 펑더화이와 총참모장 황커청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 지도자와 원수들이 개회사 비슷한 걸 했다.

류샤오치는 비유에 능했다. “베이징을 떠난 비행기가 난징을 향했다. 항로는 직선이 아니다. 좌우와 위아래를 반복하며 하늘을 날지만 목적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간 벌렸던 운동의 방향은 정확했다. 점차 좋아질 거다”라며 서두를 떼더니 갑자기 “군사구락부” “외국과 내통” “여산에서 난을 모의했다”며 펑더화이를 가혹하게 비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펑더화이는 들고 있던 연필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저우언라이는 신중했다. “펑더화이 동지는 생각이 깊지 못했다. 우리가 일을 잘못하는 바람에 펑더화이 동지가 잘못을 저질렀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는 원래 그런 놈”이라며 냉소를 지었다.

천윈(陳雲·진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 입도 벙긋 안 했다. 린뱌오가 마오쩌둥에게 가서 일렀다. “천윈은 꼿꼿이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마오쩌둥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건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다.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다. 천윈은 우파로 일관한 사람이다.”

9월 9일,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냈다. “30여 년간 베풀어 준 인내에 감사한다. 베이징을 떠나겠다. 인민공사에 가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다.” 일주일 후,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전인대(全人代) 결정사항이라며 인사명령을 발표했다. “국무원 부총리 린뱌오에게 국방부장 겸직을 명한다.”

국방부장에서 쫓겨난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7년간 살았던 중난하이를 떠날 준비를 했다. 황혼 무렵만 되면 영복당(永福堂) 주변을 산책하며 감회에 젖었다. 하루는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이 찾아왔다. “무슨 말이라도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게 해라. 그대로 마오 주석에게 전하겠다.” 평소 친한 사이였지만 펑더화이는 차만 마실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주석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당행위나 자살은 하지 않겠다. 농촌이 그립다. 농부가 되어 자력기식하며 살고 싶다.” 이젠 필요없다며 원수 복장도 반납했다.

9월 30일,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펑더화이는 중난하이를 떠났다. 배웅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스산한 가을 바람이 대장군을 배웅했다”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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