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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리샴, 미국 대통령 후보와 맞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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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존 그리샴이 공화당을 혐오하며 상당히 진보적인 쪽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이 지닌 설득력의 대부분이 약자의 정의를 옹호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런 식의 가면을 쓰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일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간혹 존 그리샴은 자신의 사회적 사명감을 여지없이 드러낸 작품을 쓰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번에 번역본이 출간됐지만, 미국에서는 2000년에 출간된 존 그리샴의 소설 『톱니바퀴』(신현철 옮김, 북@북스)는 그리샴의 정치색을 한껏 드러낸 작품이다.

재소자 동업자들과 대통령 후보와의 일전

플로리다 연방감옥 트럼블교도소에 동업자로 불리는 세 명의 전직 판사 출신 재소자인 조 로이 스파이서, 핀 야버, 하트리 비크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전직의 경험을 살려 교도소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분쟁을 처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마약치료센터에 입원한 가상의 동성애자 젊은이를 만들어놓고 전국의 부유하면서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적 성향을 밝히지 못하는 대상을 골라 사기행각을 벌일 생각에 여념이 없다.

2000년이고 플로리다라면 어쩐지 미국 대통령 선거가 기억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앨 고어는 투표율에서는 부시를 이겼으면서 플로리다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민주당 정권을 공화당에게 넘겨줬다. 부시의 공화당 정권은 처음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피의 보복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부시 정권은 설득력 없는 MD를 들고 나와 세계적으로 그 정치력을 의심 당했다.

과연 부시 정권이 중간선거까지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상당했다. 그러던 부시 정권이 단번에 미 국내는 물론 세계인들의 동의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두 잘 알 것이다.

그리샴이 부시 정권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를 빼고는 이 소설과 부시 정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소설은 플로리다 연방감옥에서 미 대통령 후보 아론 레이크의 이야기로 바뀐다. 그저 평범한 의원에 불과한 아론 레이크는 CIA국장 테디 메이너드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발탁된 뒤, 국방예산 증액이란 구호 하나로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된다.

테디 메이너드는 레이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예컨대 카이로주재 미국대사관의 테러 사실을 미리 감지했으면서도 그냥 놔두는 식이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는 그렇게 많이 죽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정도다.

『톱니바퀴』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수시로 오가면서 점점 사건의 핵심 쪽으로 들어간다. CIA에 대한 ‘상식적인’ 적대감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마치 미국 정치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릴 것처럼 보였던 그리샴은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면서 무기력한 지경에 빠져든다.

예컨대 이 두 이야기의 접점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동성애적 성향과 이를 이용한 사기극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24시간 CIA의 감시를 받는 대통령 후보가 몰래 집을 빠져 나와 동성애자가 보내는 편지를 받기 위해 비밀사서함으로 달려간다는 설정이나 국방비 증액을 위해 카이로에서 수백 명이 죽도록 내버려둔 CIA가 고작 감옥에 갇힌 세 명의 재소자의 입을 막지 못해 6백만 달러나 주면서 대통령 후보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퍼뜨리지 못하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CIA가 배후조종하는 미국 대통령 선거

결국 『톱니바퀴』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강하게 드러냈던 그리샴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실패작으로 남을 것 같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플롯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을 단숨에 읽게 한 그리샴의 힘만은 상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대목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타이너는 한국의 외교관과 사업가들과 정계의 거물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정부만큼 미국의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을 환영할 만한 국가도 없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5백만 달러는 기부할 거야. 물론 그것은 1차 기부금에 불과하지.”

한국 정부도 미국의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을 환영하겠지만, 그건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군사력 강화는 곧 무기판매와 직결되는 문제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고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기도 한 것 같다. 그리샴의 『톱니바퀴』는 소설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최근의 정세 변화에 대한 한 가지 독법으로는 도움이 많았다.

(김연수 / 리브로)(www.libr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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