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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온 편지 「물결은 메콩강까지」의 작가가 <독자와의 대화로서> - 선우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소설가란 무엇을 꼭 보고 써야 하는 것 도 그럴 수 있는 것 도 아니다.
이광수씨나 김동인씨는 수양을 만난 것도 아니며 그 시대를 산것도 아니지만 수양대군(세조)을 그려내었고 요즘 김성한씨는 같은 입장에서 「이성계」를 써내고 있다. 「레오·톨스토이」도 그가 살지 않은 시대의 전쟁을 마치 관전한 듯이 「전쟁과 평화」에 그렸고 고래잡이를 본적이 없는 「허먼·멜빌」은 「모비·딕」(백경)의 명작을 남기고 있다.
작가는 앉아서 과거와 미래를 가리는 상상력과 먼데서 일어난 사건의 핵심력을 꿰뚫는 투시력을 가져야한다.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야하는 소이연 이다.
따라서 월남전을 그린다고 해서 반드시 월남을 보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
나는 국군 파월이 우리의 적극적인 의사에서라기보다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데 더 없는 비장미를 느낀다. 거기 운명을 절감할 수 있는 까닭이다.
(나는 서부활극 가운데서도 「하이눈」같은 영화의 주인공을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장황에 끌려 들어가서 권총을 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을 적극적인 운명으로 지양시킨 인간의 의지를-.
마을 사람들은 살벌한 총격전이 벌어지기를 꺼려해서 누구도 그에게 찬성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에게 편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기에 국군 파월이 결정된 이상 그래서 우리네 젊은이들이 월남에서 싸우고 죽어 가는 이상 나에게 있어서 찬성이냐 반대는 무의미했다. 나에게는 오직 운명적인 현실이 있을 뿐이었다. 가장 극적인 현실이-.
내가 월남전에 대해서 소설가로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이 바로 이점에 있다. 그러한 나를 걱정 해주는 가까운 친구들도 있었다. 현대의 작가가 전쟁에 열중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닌가- 하고. 그러한 충고를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견해는 역시 원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어떡 허느냐? 아니 운명을 어떡 허느냐? 현실을 외면하더라도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이점에 나는 소설작가가 진지하게 다루어야할 문제가 숨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오래간만에 작가로서 흥분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내가 「물결은 메콩강까지」를 쓰게된 동기다.
따라서 내가 이제까지 가눌 수 없는 흥분과 전인적인 몰두로서 소설을 쓰게된 것은 이것이 10수년전의 「불꽃」과 「사도행전」(미완)에 이은 세 번째의 일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된 이상 나는 앉아서 상상력과 투시력만을 구사해서 소설을 쓸 수는 없었다. 가서 월남의 풍물이나 전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글」에서 싸우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마음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마음을 알아보아야 했다.
나는 월남에서 배낭을 메고 수통을 차고 직접 일선소대원들을 따라다녔다. 그네들과 함께 먹고 자고 야기했다. 「베트콩」을 만나고 그 가족들을 보고 「사이공」의 술집에서는 포성을 들으면서 웃음을 파는 여자들도 보았다. 「망고」나무 그늘에서 오수를 취했고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음미했다. 월남인거지도 보고 자가용 「택시」를 모는 귀부인도 보았다.
나는 나의 그러한 경험을 직접 독자들에게 들려줄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소설 속에서 엮어 넣어야 한다.
그것이 소설작가가 할 일이니까. 그러나 미리 이런 말만은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신에 들렸다』고 했지만 나는 『인간에 들렸노라』고-.
따지고 보면 너나없이 더럽고 추하고 구원이 없어 보이는 인간이면서 그러한 비린내 나는 인간이면서 어쩌면 인간은 그토록 너나없이 가엾고 측은하고 사랑스럽고 버릴 수 없는 존재일까.
죽는 자 죽이는 자 웃는 자 우는 자 이쪽이고 저쪽이고 간에-.
(여기서 이제까지 몇 번 연재를 거른 데 대해서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드린다.
게으른 탓이 아니라 원고를 이역에서 보내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것과 작가로서의 어쩔 수 없는 벽에 부닥친 탓이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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