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회귀(완) - 조문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음- 하는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나는 뒤돌아다본다. 노파가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들여다보던지 지숙의 결혼사진을 책상에 도로 놓고는 노파에게로 간다. 노파가 턱을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침대로 옮겨달라는 뜻이다. 부축하는 대신 나는 노파를 번쩍 안는다. 노파를 안는 순간 냄새가 난다. 갓난아기에게서 나 듯 우유냄새 같기도 하고 마른나무에서 나듯하는 달착지근한 비린 냄새다. 푹신한 침대에 살그머니 내려놓을 때 노파의 눈이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빛을 띠고 있다. 그 눈빛이 갑자기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안아다 누여 드려야지. 젊은 남자에게 안기는 건 훨씬 기분 좋은 것이라는 걸 느끼도록.
『나, 지금 꿈 꿨어.』노파가 갑자기 이삼년은 젊어진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꿈을 다 꾸셨어요?』나는 신기하다는 듯 좀 과장을 섞어 반문한다. 노파는 쇠약한 탓으로 자주 악몽을 꾸거나. 아니면 종잡을 수 없는 꿈을 꾸다가도 깨고 나면 흐릿하게 남아 이야깃거리로 꾸미지 못하는걸 불만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식 하는 꿈.』『누가요?』
신랑은 바로 나라고 한다.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신부는 누군지 자세치는 않고 내가 연신 싱글벙글 하더라는 것이다.
『근데, 자넨 왜 아직 장가를 안가지?』
노파는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며 이번에야말로 그 원인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따져 물었다. 전에도 지나가는 말로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물음을 받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물어물 넘겼다. 노파의 지금 태도엔 이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지숙이와의 미심쩍은 관계까지 다 털어놔 옛말처럼 되새겨 보라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지숙일 아직 생각하나?』
노파는 나직하나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서 말한다.
『지숙일 아직 생각 하느냐구요?』
불의의 노파의 질문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양 반문한다.
『나한테 하고싶은 얘기가 있음, 죄다 털어놔 보지.』
노파의 이 말은 곧 그 동안의 나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하여(나는 노파가 운명을 달리한 후로 저 세상에서도 나의 은혜를 다 못 갚는 다고 생각하길 간절히 바라지만) 가난을 이유로 나와 지숙을 매어버린 것을 후회하여 이제 늦게나마 너의 딱한 처지에 동정하여 무슨 공격을 해와도 나는 감수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었다.
나는 갑자기 덜덜덜 떤다. 아랫배에 힘을 주어본다. 나는 지금 노파와 씨름을 하고있다. 노파에겐 나를 쩔쩔 매게 하는 비법이 있다. 만일 내가 이 자리에서 쓰러지면 그 순간 나는 급사할지도 모르리란 예감이 든다.
『지숙인 남의 부인이 된 사람인 걸요.』
『그럼 왜 여태 장가를 안가지?』
『그건….』
『정말 지숙이 땜에 장가 안 가는 건 아니란 말이지?』
나를 향해 안간힘을 쓰며 상반신을 세우려는 노파에게 나는 얼른 베개를 괴어준다. 나는 노파의 이상한 광채를 발하며 쏘아보는 저런 눈길은 감당할 길이 없다. 숨이 콱 멎는 듯 답답하다. 시선 처리와 손 처리에 나는 잠시 낭패해 한다. 이꼴이 뭐람. 노파는 내 마음을 꿰뚫을 듯 쏘아본다. 나는 외면한다. 그 눈속으로 흡수 될 것만 같다. 나는 침착해야 한다. 나는 지숙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미 내 속에서 죽은 사람이다. 노파의 말은 엉터리다. 엉터리 말을 하는 사람을 이번엔 내가 쏘아본다.
『전, 지숙일 잊은 지가 오랜 걸요.』
입밖에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심중의 판단이 결정적이라도 되는 듯 나는 조급하게 말한다.
한동안 침묵이 쌓인다.
『내 딸을 자네가 달라고 한 때가 생각 나?』
『네, 생각나요.』
나는 속이 타는 듯 했으나 웃어 보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의 웃음은 노파에게 전염되어 노파의 주름진 근육을 웃는 듯한 형태로 만들었다.
『가난하다고 내가 거절했었지만 말야.』
노파는 이 말을 맺어버리면서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럽고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오천여 학생들을 거느리던 때의 위엄조차 깃들여 있다. 저 위엄이 지숙이로 하여금 동훈에게 시집 가게끔 만든 것이다.
『지금 같으면 어떡하시겠어요?』
『지금 자네가 내 딸을 달라고 했다면 말이지?』
나는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자네에게 주었을 거야.』
나의 질문이 쑥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지숙인 귀국할 가망이 없고, 여생이 얼마 안 남아 유일한 후견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이 마당에서 노파의 진실한 답변을 기대하는 게 어리석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노파의 지금 답변은 정말일 것이다. 아무리 주판을 퉁겨 보아도 노파 일신상으로 보면 내 쪽을 택하는 게 편할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자넨 용기가 없었단 말야.』
『용기라니요?』
『지숙일 자네 것으로 만들어야 했었는데‥』
용기. 십 삼년 동안 지숙이와 사귀면서 지숙이를 놓친 용기. 마지막날 밤 여관에서 지숙을 끌어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용기. 동훈이 사주는 양옥집이란 한마디에 호랑이 앞에 강아지처럼 떨던 용기.
『지금 용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한가지...』
『?』
『선생님이 정년퇴직 하신 후 갑자기 증권에 손을 대신 경우가 궁금한데요. 그런 일은 용기 때문이었나요?』
『...... 』
노파가 얄밉다는 듯 빤히 나를 올려다본다. 턱을 너무 추켜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나까지 숨이 차온다.
『그때 선생님께서 증권에 손만 대지 않으셨던 들. 지숙은 지금 나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노파는 눈을 스르르 내리 감는다. 양미간이 때때로 씰룩인다. 그 씰룩임에는 격렬한 감정이 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
나의 목소리는 침착치가 못하다. 노파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다.
『선생님!』
나는 입김으로라도 노파의 눈을 뜨게 하려는 양 크고 힘차게 부른다. 이윽고 노파가 눈을 뜬다. 나를 쳐다본다. 그 분에 눈물이 흥건히 괴었음을 나는 발견한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노파는 축축하게 젖은 눈을 천장에만 둔 채 아무런 표정이 없다. 저런 얼굴로 그때 일을 돌이켜 보고 있는 것일까.
『잘 들어보세요. 제가 선생님 댁에 그 동안 드나들었던 것은 선생님께서 가난하다고 내동댕이쳤던 제가 얼마만큼 선생님의 손색없는 사윗감이 될 수 있었던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였죠. 선생님은 방금 지숙일 저한테 안준 걸 후회하셨습니다. 이젠 됐습니다. 왜냐하면 전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선생님을 사육해 온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노파가 천장에 꽂고있던 시선을 서서히 거두고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이 매섭다. 입가의 근육이 서너 번 연거푸 씰룩인다. 나는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말을 잇는다.
『그리고, 절 보고 가난하다고 모욕을 주셨던 일을 되갚아 드릴테니까요. 선생님의 <늙는 일> 말예요. 한치한치 무덤으로 다가가는 광경을 바로 제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이때였다.
『나가 줘.』
노파의 목쉰 듯 하면서도 헐떡이는 목소리가 나의 다음 말을 끊었다. 그러나 나의 흥분한 외침과 노파의 탁한 발음의 지껄임은 흡사 씨름하듯 한동안·엉켜져서 구분되지가 않았다.
노파는 계속하여 『나가 줘』 소리를 애원하듯, 발악하듯 지껄였으나 이윽고 기진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는 나도 지쳐버려 더 이상 지껄이진 못하고 호흡만 몰아 쉴 따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파의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나를 향해 뱀이 꿈틀거리듯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노파는 입속으로 연신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두손으로 되풀이 허공을 할퀴었으나 멀찍이 물러나 앉은 나의 살점을 꼬집지도 찢지도 못한 채 이윽고 털썩 내려지고 말았다. 노파의 입에서는 거품만 지저분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한주일 후에 노파는 운명하였다. 나하고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부터 식모 아줌마에게 매일 수면제 두알씩을 달라고 했었다는 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게 일주일분을 모아 한꺼번에 삼킨 것을 알 수 있었다.
노파를 선영이 있는 고양군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은 후 흙을 힘껏 밟는 나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후들후들 떨림은 노파의 주검을 앞에 놓고 산정의 오래도록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앞에 놓고 회심의 치아를 쩍쩍 벌리리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일단 일이 끝난 후의 허탈감 속에서 고물고물 피어오르는 것은 결국은 당한 건 아무래도 내편이라는 맹랑한 사념이었다. 노파는 가해자였고 나는 겨우 수습을 한것 뿐이다.
나는 나에게 골탕을 먹였었던 그 <먹이>를 좀 더 가지고 장난했어야만 했다.
이 후들후들 떨림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속에서 나는 장례식 때 귀국한 초췌한 모습의 지숙에게 청혼을 했다. 지숙은 동훈과 이미 이혼한 몸이었다.
나는 지숙이를 가지고 장난을 계속 할 자신은 없다. 그 때문에 후들후들 떨림 속에서 나는 온 몸 구석구석에 배어드는. 부끄러움을 감당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당선소감> 춘하추동
감히 나는 이런 기쁨을 예측하고 있었다. 즐거움은 지금 딱 맞아 떨어지는 재미마저 들이고 있다.
자기형성에 있어 소설만큼 빠른 방법도 없을 것이다. 자기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능청맞은 요술사가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언젠가 미국 우주비행사의 수기에서 대기권내에서의 우주선이 받는 태양면과 그 그림자면의 냉열도가 각각3백40도와 5백도나 차이가 난다는 대목을 읽은 일이 있다.
몽뚱이의 반쪽은 타죽고, 반쪽은 얼어죽는 것이다. 공기가 있고, 물이 있고, 바람이 있고,춘하추동이 있고, 더군다나 아름다운 사람까지 있는 지구에 내가 살고 있다. 더불어 이 상념은 「나치」의 「아이슈비치」수용소에 내가 갇혀있지 않다는 무한한 자유와 함께 나를 언제나 감격케 한다. 나의 미숙한 소세를 늘 칭찬해 주시던 K선생께 감사한다.

<약력>
▲당 33세 ▲인천중학 졸 ▲영어교사 역임 ▲현 영화조감독 ▲서울 성북구 인수동 555의 67(4통 9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