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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뜨지만 치밀하게 … 기다림의 정치로 제2 부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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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호 28면

박근혜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이 2010년 11월 G20(주요 20개국) 서울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메르켈 총리와 만나고 있다. [중앙포토]

“헬무트 콜 총리가 묵인한 사건들은 기민당에 큰 피해를 줬다. 정치 비자금 스캔들은 콜 총리나 기민당 모두에게 비극이다. 이제 콜 시대를 끝내고 미래로 가자.”

‘행복한 경제강국’ 독일의 리더십 해부 ⑧앙겔라 메르켈<끝>

1999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대부(代父)였던 콜 총리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버리기 위해 마치 때를 기다린 것 같았다. 기민당 사무총장이던 그는 예상을 깨고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그해 12월 22일자 2면에 ‘콜이 기민당에 큰 피해를 주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그 파장은 컸다. 이에 앞서 99년 11월 4일 콜 총리가 재임 시절(1982~98년)에 불법 정치자금을 모은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기민당 재무담당인 발터 키프를 탈세 혐의로 구속했다. 콜은 총리 시절 기부금 형식으로 돈을 받고도 이를 신고하지 않고 비자금으로 사용했다. 불법이었다.

집권당인 사민당과 녹색당은 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의회 청문회를 열었다. 처음에 발뺌하던 콜은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마지못해 사실을 시인했다. 수사 과정에서 콜은 통일 업적을 내세우며 조사를 방해하기도 했다. 국민은 분노했고 기민당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콜과 가까운 정치인들은 스캔들을 덮기에 급급했다. 메르켈의 콜 비난 뒤 기민당의 일부 의원은 그를 ‘친부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여론은 “국민 불신을 해결한 용기 있는 믿음의 지도자”라고 손을 들어줬다. 기민당 간부들 중 비자금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콜의 후계자이자 강력한 총리 후보였던 당 총재 볼프강 쇼이블레, 헤센의 주지사 롤란트 코흐도 연루됐다. 콜은 기민당 명예총재에서, 쇼이블레도 총재에서 각각 물러났다. 이때 메르켈에게 붙은 별명이 ‘콜의 저격수’였다.

메르켈은 당 재건을 위해 총재 자리에 도전했다. 몇몇 계파의 보스들이 아니라 전국 투어를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방식으로 지구당 당원들을 직접 공략했다. 그러면서 모성 이미지를 연출했다. 메르켈은 자신의 슬로건 ‘작은 발걸음의 실천 전략’을 행동에 옮겼다. 2000년 4월 10일 25년간 기민당 총재였던 콜이 불참한 전당대회에서 메르켈은 96% 지지를 얻어 새 총재로 선출됐다. 동독 출신 여성이 독일 최대의 보수정당을 이끌게 된 것이다.

2010년 11월 15일 메르켈 총리(왼쪽)가 칼수르에서 열린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콜 전 총리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친부 살인자’ 비난 감수하며 콜과 결별
메르켈의 리더십이 첫 시험대에 오른 것은 2002년 총선을 앞두고서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적녹(赤綠)연정인 사민당·녹색당의 연합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메르켈은 총리 후보 지명전에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여론조사와 당원 지지도에서 자매당인 기사당(CSU)의 총재 에드문트 슈토이버에게 밀리고 있었다. 현실주의자인 그는 총리 후보를 포기하고 실리를 택했다. 그는 슈토이버가 머물고 있던 뮌헨으로 달려가 담판을 벌였다. 자신이 총리 후보를 포기하는 대신 차기 후보를 약속받았다. 메르켈은 슈토이버를 당선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슈뢰더에게 패배했다.

메르켈은 총리직 도전을 위해 4년이란 시간을 벌었다. 물리학 박사인 그는 과학자답게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 정치판에서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깨달았다. 언제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위기관리 능력을 쌓아갔다. 기민당에서 서독 출신 남성 정치인들은 거의 다 나가떨어졌다.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되거나 스스로 빠진 자충수 때문이었다. 야당 지도자의 위상을 굳힌 메르켈의 과녁은 곧장 슈뢰더 총리에게로 향했다. 그를 꺾기 위해 국가 비전과 정책 프로그램, 정치적 무기가 필요했다. 메르켈은 독일 건국의 아버지들을 공부했다. 기민당 출신의 아데나워 초대 총리와 에르하르트 2대 총리를 벤치마킹했다.

메르켈은 먼저 민생 이슈에 몰입했다. 적녹 연합정권은 14%의 높은 실업률, 마이너스 성장률, 1조1850억 유로의 재정부채 등 총체적인 위기의 늪에서 헤매고 있었다. 해외에서 ‘독일병 환자’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였다. 메르켈은 위기 극복 방안을 모색하는 팀을 출범시켰다. 에르하르트가 제시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업그레이드한 ‘신사회적(neue soziale) 시장경제’라는 키워드를 선택했다. ‘모두가 잘사는 나라’에다 ‘참여하는 사람에 대한 혜택’, 즉 일자리 창출과 함께 성장에 기여하는 사람에 대한 혜택을 강조했다. 이에 맞서 슈뢰더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성과 연금개혁을 포함한 ‘어젠다 2010’을 발표한다. 사회복지제도의 개혁이었다. 정치평론가 쿠르트 슈마허는 이를 두고 “슈뢰더가 메르켈의 덫에 걸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진보 지지층을 거스르는 ‘어젠다 2010’ 개혁은 단기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총선에서 노조세력과 은퇴 세대는 슈뢰더와 사민당에 등을 돌렸다.

메르켈은 외교정책에서 슈뢰더와 각을 세웠다. 그는 아데나워가 내건 독·미 동맹 복원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2002년 총선 당시 슈뢰더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선 반미 분위기를 타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2005년 총선에서 슈뢰더를 무너뜨리기 위해 건국의 정신인 서방과의 연대를 내걸었다. 선거날에 각 당 총재가 참여하는 ‘코끼리 라운드’ TV 토론에서 슈뢰더는 사회자와 메르켈을 무시하는 거만한 행동을 드러냈다. 그가 슈뢰더 총리를 꺾게 만든 원동력은 ‘기다림의 정치’였다. 당시 총선에서 기민당(38.2%)은 사민당(37.2%)에 1%포인트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대연정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메르켈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그는 복지 확대, 원전 폐쇄 등 사민당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외교·재무·경제 등 8개 주요 부처의 장관 자리를 사민당에 넘긴다. 대연정을 통해 국정운영 시스템을 리모델링해야 했다.

징병제를 55년 만에 모병제로 바꿔
2005년 11월 22일 메르켈은 최연소(51세), 최초 여성, 최초 동독, 최초 과학자 출신이란 몇 개의 수식어를 달고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전임자가 시작한 사회복지 개혁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을 외면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취임 후 첫 의회 연설에서 전임자 슈뢰더 총리에 대해 “용기 있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경제성장을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했다. 정부 지출의 절감을 통해 재정을 공고히 했다. 정파·정당 간의 기나긴 협상과 타협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8개 조항을 담은 ‘연방주의 개혁’을 발표했다. 관료주의 타파, 의료개혁, 기술혁신 등이 핵심 내용이었다. 또 ‘성장촉진법’을 제정해 호텔업 같은 일부 업종의 부가세를 19%에서 7%로 대폭 인하했다.

메르켈의 개혁은 곧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실업률은 하락했고 성장률은 유럽에서 최고인 3.8%를 기록했다. 2009년 총선에서 메르켈은 사민당을 밀어내고 자민당과 소연정을 성사시키는 데 성공한다. 메르켈은 2011년 3월 55년 만에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는 군 개혁을 주도했다. 또 같은 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후 세계 처음으로 2022년까지 ‘탈핵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보수적인 집권당 내부에서 반발도 적지 않았다. 동독 지역인 마그데부르크대학의 볼프강 렌츠시(정치학) 교수는 “독일의 최고권력을 동독 출신들이 모두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통일을 이룩했다”고 평가한다. 메르켈과 요아임 가우크 대통령이 동독 출신이기 때문이다. 메르켈 취임 이후 서독인들이 동독인을 비하하는 ‘오시(Ossi·2등 국민)’와 동독인들이 서독인을 조롱하는 ‘웨시(Wessi·거만한 사람들)’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박 대통령과 2000년부터 돈독한 사이
메르켈의 리더십은 2008년부터 잇따른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유로존 국가들의 재정위기 속에서 독일은 ‘제2의 경제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선진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3% 안팎의 성장률, 4%대의 낮은 실업률, 무역흑자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집권 7년간 성공하고 있는 비결은 뭘까. 89년 당시 35세였던 메르켈은 동독 붕괴 과정에서 ‘민주개혁’ 운동에 동참했다. 이어 서독 기민당에 입당해 91년 연방의원이 됐다. 그에게 행운도 있었다. 통일의 주역인 콜 총리가 그를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부 장관으로 연거푸 발탁했다. 하지만 그는 콜의 부패 정치와 단절했다. 자신의 정치 경력 2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스캔들 또는 부패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다. 그는 자식이 없고 총리 관저가 아닌 사저에 살고 있다. 부모·형제를 포함해 누구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우둔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메르켈은 악수를 하면서 이미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독일 국민이 좋아하는 이유다. 그는 말수가 적다. 생각을 많이 하고 주위에 많은 자문을 한 다음 결정을 내리는 겸손함과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

경제잡지인 포브스는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메르켈을 선정했다. 4년 연속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서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2000년부터 돈독한 우정을 쌓아왔다. 메르켈은 올 9월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한다. 전망은 반반이다. 최근 여론조사기관인 포르자가 실시한 조사에서 메르켈의 기민당·기사당의 지지율은 41%로 나타났다. 문제는 자민당의 컷오프 탈락 가능성이다. 자민당이 지지율 5% 이하면 소연정이 불가능하다. 사민당과 다시 대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사민당·녹색당의 승리 가능성이다. 그럴 경우 메르켈은 정치 무대에서 사라진다. 메르켈은 독일을 유럽 중심국가로 자리매김한 ‘뚝심의 여장부’란 평가를 받는다. 앞으로 3선에 성공하면 그의 경쟁자는 역사의 인물밖에 남지 않는다. 아데나워·브란트·콜 같은 위대한 정치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김택환 1983년부터 10년간 독일에서 공부한 뒤 학자·언론인 생활을 하며 독일을 꾸준히 공부해 왔다. 대한민국의 미래 모델을 모색하기 위한 『넥스트 코리아』를 최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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