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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기술이 가족 인연 맺어줬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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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광주 시내에서 망월동 5·18묘지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자리한 주룡마을.반듯한 양옥들이 많은 동네지만 이곳에는 도편수가 둘이나 산다.맨 윗쪽 대나무숲 아래 기와집에 사는 윤석운(尹錫雲·41)씨와 그 아랫채의 진채식(陳彩植·65)씨가 주인공.

尹씨가 불혹(不惑)을 갓 넘긴 나이에 도편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16년 전 스승 도편수 陳씨를 만난 덕이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尹씨는 1980년 광주 동신전문대에 입학했다 5·18이 터지고 가세가 기울자 학업을 포기한 그는 군대를 다녀온 뒤 커피숍 등의 실내장식 일을 했다.

그러다 25세 때인 86년 봄 선배 목공을 따라 경남 함양의 재실(齋室) 공사장에 간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건축을 총괄하던 이가 마침 광주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내 밑에 와 일해 볼란가”라고 물었다.그가 바로 지금 매일 보고 사는 陳씨였다.

“나는 마흔아홉 때였을 거야.젊은 친구가 연장을 제법 다루더라고.심성도 괜찮은 것 같아 끌어당겼지.”

대목(大木)이 신출내기 소목(小木)에게서 소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尹씨는 일거리가 있다고 부르면 두말없이 연장 가방을 챙겨 陳씨를 따라 나섰다.통나무를 네모지게 다듬거나 깎고 파는 일부터 했다.큰 나무를 다루는 게 자잘한 실내장식 일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몇달을 데리고 다니더니 ‘혼자 살자면 불편할 테니 우리 윗채에 들어와 살라’고 하십디다.”

尹씨는 陳씨네 울 안으로 이사했고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기둥·보를 밧줄로 얽어 목도질할 때는 어깨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키 동갑이나 되는 톱과 씨름하는 등 해뜰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일하고 나면 허리를 펴기도 힘들었다.

“고지식한 양반이라서 일을 대충 하거나 꾀를 부릴라치면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젊은 목수는 욱하는 성미에 그만 때려 치울까 하는 생각이 든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노련한 도편수는 “일을 그르치면 다 대목 책임이다.인부들을 휘몰아서 일을 시킬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일을 거들어 절이나 사당·제각,큰 기와집들을 하나씩 낙성(落成)한 뒤 느끼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전통 기술을 이어간다는 긍지도 컸다.

일을 맡아 외지에 나가 길게는 몇달씩 함께 숙식하다 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계속됐다.이 사이 집 안에서도 인연이 켜켜이 쌓였다.처음 陳씨를 만났을 때 여고 2학년이었던 셋째 딸과 사랑을 키워 갔던 것이다.

둘이 93년 11월 결혼식을 올리면서 두 사람의 호칭이 ‘장인 어르신’과 ‘윤서방’으로 바뀌었다.

결혼 후에도 한 집에 살던 사위와 장인은 95년 지금 사는 한옥을 직접 지었다.한옥으로서는 제법 큰 25평짜리지만 못은 하나도 안 썼다.마루까지 나무를 깎고 파 꿰맞췄다.

한 식구가 되면서 기술 전수는 한층 빨라졌다.尹씨도 사명감을 갖고 전보다 더 진지하게 배웠다.

陳씨는 사위를 데리고 지은 건물들은 찾아다니며 몇년 전 어떤 나무를 어떻게 썼는데 지금 상태가 어떤지 등을 복습시키기도 했다.

이같은 수업 끝에 사위 尹씨는 4년여 전 지리산 천은사의 일주문(一柱門)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완공했다.일주문은 두 기둥만으로 지붕의 큰 하중을 이겨내야 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특히 천은사 것은 기둥 사이로 도로가 지나 대형 차들이 오갈 때 생기는 진동도 고려해야 했다.이 공사가 끝난 뒤 장인은 “이젠 됐다.네 혼자서 일해도 되겠다”며 사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옹서간(翁壻·장인과 사위) 도편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장인 도편수는 평생 써 온 자귀·끌·대패 등을 하나씩 물려주기 시작했다.또 자기에게 들어온 일거리를 나눠 줬다.곡성 태안사 천불전과 영암의 제주 양씨 사당 등이 사위 도편수가 해 낸 것들이다.

“이 사람 기술이면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안 빠져.그리고 젊잖아,앞으로 못할 게 없지.”

陳씨는 선망해 온 목공 인간문화재 반열을 尹씨가 대신 이루면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저도 어찌 인간문화재 꿈이 않겠습니까.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위 도편수는 요즘 옛 문헌 등을 뒤적이고 탑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때가 많아졌다.강한 바람도 견뎌야 하는지라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목탑(木塔)을 복원해 보기 위해서다.그날이면 장인(匠人) 장인(丈人)의 꿈도 이루어지리라.

광주=이해석 기자
사진=양광삼 기자

*** 도편수란

도편수는 우리 전통양식의 건축을 할 때 총괄하는 목수를 말한다.대목장(大木匠)이라고도 부르며,목공들뿐 아니라 기와를 얹는 와공,미장공 등까지 모두 책임지고 부린다.건축 전 과정에 훤해야 함은 물론 풍수지리·유교·한학 외에 각 지방 풍습까지 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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