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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지단의 프랑스처럼 사회 통합 기여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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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리처드 힐 행장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정현 기자]

대한축구협회를 축구인들은 ‘한국 축구의 관제탑’이라 부른다. 협회장과 함께 5명의 부회장은 관제탑 핵심 사령멤버들이다. 이 가운데 파란 눈의 외국인이 있다. 리처드 힐(48)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장이다.

 정몽규 신임 축구협회장은 지난 7일 힐 행장을 비롯, 허정무(58) 전 대표팀 감독, 최순호(51) FC 서울 미래기획단장, 김동대(63) 울산 현대 단장, 유대우(61) 육군협회 사무총장 등 부회장을 발표했다. 축구는 스포츠 중에서도 내셔널리즘과 지역적 배타성이 유난히 강하다. 이런 종목의 특징을 감안하면 외국인이 축구협회 부회장에 오른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18일 한국SC은행 본점에서 힐 행장을 만났다. 커프스버튼을 채운 와이셔츠에 감색 양복을 차려 입은 금발의 영국 신사는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그가 한국축구와 인연을 맺은 건 2011년. 한국SC은행이 프로축구연맹 유소년 발전 프로그램을 후원하면서다. 힐 행장은 그해 9월부터 프로연맹 사외이사로 일했다. 이름만 걸친 게 아니었다. 이사회가 열리면 사전에 회의 안건을 영어로 번역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통역을 대동하고 출석해 의견도 적극 개진했다. 정 신임 회장이 프로연맹 총재에서 축구협회로 자리를 옮길 때 힐 행장도 프로연맹 이사에서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그는 “축구협회 일을 제안받았을 때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2008년 1월 한국에 왔으니 벌써 6년째 한국 생활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싱가포르 등 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한국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도 뭔가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축구 예찬론을 폈다. “축구를 하는 어린이가 많아진다는 건 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축구 대표팀의 지네딘 지단은 알제리 이민자의 후손이다. 패트릭 비에이라 역시 아프리카 출신이다. 프랑스 사회는 이민자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컸지만 월드컵 때 대표팀을 응원하며 하나로 뭉쳤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한국에서도 축구는 사회 통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은행 업무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 서강대 경영대 외부 자문위원이며, 서울시 외국인투자자문회의 부의장이다. 국가브랜드위원회 자문위원과 유럽상공회의소 은행분과 위원장도 맡고 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지난 15~16일 파주 트레이닝센터에서 열린 축구협회 워크숍에도 참석했다. 회장단과 신임 집행부, 협회 간부 50여 명이 모여 한국 축구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는 15일 낮 1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0시간 마라톤으로 진행된 현안 보고와 분임 토의에 줄곧 참석했다.

 힐 행장은 “현재 프로축구 K리그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던 때와 비슷한 변혁기”라며 “지금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상업적 성공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표팀과 소수의 빅클럽으로 부(富)와 팬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게 구조가 아니라, 저변이 튼튼한 축구 환경을 만드는 게 축구협회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축구협회 부회장 5명 가운데 그는 사회공헌활동을 담당한다. 한국SC은행의 대표로, 각종 사회공헌활동을 경험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돈만 내는 단순한 기부행위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겉만 번드르르한 게 아니라 정말 올바르고 뜻깊은 일, 상업적으로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일, 직원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참여할 수 있는 일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SC은행은 ‘Seeing is Believing(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시각장애인을 돕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힐 행장은 지난 여름 K리그 올스타와 시각장애인 어린이의 친선 축구 경기 때도 참가해 함께 땀을 흘렸다.

 그에게 ‘내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과 잉글랜드가 만난다면 누굴 응원하겠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런던 하이버리에 살았다. 그때부터 우리집은 아스널 팬”이라고 딴청을 피운 뒤 “한국과 잉글랜드가 나란히 본선에 진출한다면 매우 기쁜 일”이라며 웃었다.

글=이해준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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