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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시인 김혜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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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은 일종의 시론집이다. 동시에, 단순한 시론집이 아니다. 이 책은 시인이 시를 잉태하는 과정과 그것을 출산하는 고통과 환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시 아닌 것들로 가득 메워져 있는 듯하면서도 결국엔 시 얘기다.

이 책에서 시는 부재하는 방식으로 전체의 내용을 포섭한다. 행간의 작은 여백을 들여다보면 우주가 보이고, 휘돌아나가는 문장들의 급류 속에 휩쓸려 가다 보면 삶의 고통과 환희 속에서 울고 웃는 김혜순이라는 한 개인과 만나게 된다.

시의 잉태와 출산의 과정을 말하는 김혜순 시인
“철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문학 등이 혼융된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싶었어요. 말하자면 남성들의 선형적인 질서나 논리 바깥으로 흘러가는 그런 글쓰기죠. 그래서 시를 분석하거나 느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음대로 풀어 써봤어요. 신나게 잘 써지는 글쓰기였죠. 제가 알고 있는 것, 느끼는 것들이 한데 섞여 단번에 풀려 나왔기 때문에 각주 달 것도 없었어요.”

특유의 느릿한 어투로 말문을 여는 김혜순 시인. 샤프하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외모지만, 그녀와 한 5분만 같이 얘길 나누다 보면 애초의 깍쟁이 같은 인상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어디에서든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어머니 같기도 하고, 교무실에서 사고뭉치 학생을 얼르고 달래는 교사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런 범상한 인물유형 속에 오래 갇혀있지 않는다. 어머니로 보이는 순간, 그녀는 다시 시간의 물살을 거꾸로 뒤집으며 소녀로 변한다.

‘소녀’라고는 했지만, 그 ‘소녀’는 어떤 남성적 편견에 의해 조작된 순진하고도 가녀린 그런 소녀가 아니다. ‘소녀’란 말 그대로 작은 여자를 말한다. 작지만 큰 여자. 물론, 작거나 크다는 건 단순히 물리적 부피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정신의 부피, 감각의 밀도를 얘기하는 경우엔 다른 표현을 궁구해야 한다.

그렇듯 김혜순 시인(의 말과 글)은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수시로 변한다. 그녀에겐 말한다는 것, 글쓴다는 것 자체가 한없이 어두운 부재 속에 자신을 담그는 것인 동시에, 그 부재를 껴안은 채로 변화하는 만상들과 날렵하게 통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느리게 흐르다가 급격히 추락하기도 하고, 낮게 가라앉았다가 커다란 물굽이로 솟구치는 그녀의 문체는 그녀의 몸 자체다.

“문학적 천재는 다 여성성을 지니고 있었어요. 보들레르도 그렇고 랭보도 그렇고 … 이 책의 주제는 여성적인 글쓰기를 얘기하는 거지, 여성만의 글쓰기를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김혜순 시인에 의하면, 꽉 차고 질서정연한 듯 보이는 세계의 표면엔 어둡고 혼란스런 부재의 공간이 가려져 있다. 시인들로 하여금 시적 환상의 상태로 빠지게 만드는 게 바로 그 부재하는 공간, ‘부재가 놓여있는’ 공간이다. 그건 삶의 어떤 순간, 일상의 모서리를 비집고 들어와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시인이란 그걸 느끼고 발견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좋은 시인이란 다들 두 개의 성기를 가지고 있다. 시인들은 스스로 교미하여 또 다른 자신을 낳는다. 그리하여 하나의 자아가 죽고 다른 자아가 생성된다. 모든 시는 그런 이중교배와 이중출산의 과정을 거쳐 태어나고 버림받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다. 그 소리는 그러나 기존의 남성적 이데올로기 질서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집도 절도 없이 떠다닌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았으니 오죽하랴.

“이 책의 부제로 쓴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나’등은 모두 사회의 질서를 위반하는 자들, 사회적인 파렴치범들이에요. 사회에서는 그게 중요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 체제 내에서는 도외시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전 시적인 목소리가 바로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로 시를 말하려했던 거죠.”

시인의 현실은 시인 스스로 구축하는 거예요
물론, 이 말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혜순 시인은 파렴치범이기는커녕, 유수한 문인들을 배출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의 전임교수다. 따라서 그녀가 말하는 파렴치범은 남성적 언어의 질서 바깥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김혜순 시인은 모든 시인, 특히 여성적 언어로 말하는 시인의 원형을 바리데기에서 찾는다. 바리데기란 이른바 그녀가 말하는 파렴치범의 (적어도 한국적)근원이다. 바리데기는 부모에 의해 버려진 불라국 공주가 이승과 구천을 동시에 떠돌면서 결국에 병든 부모를 낫게 한다는 구비서사무가의 주인공이다.

대개 ‘심청전’류의 효(孝)의 표상으로 구전됐지만, 수다하게 존재하는 이본들을 꼼꼼히 분석한 김혜순 시인은 바리데기로부터 시의 본질, 시의 생성원리를 읽어낸다. 그건 세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여성적 에너지의 원천과도 같다. 구천을 떠돌며 수시로 생몰을 거듭하는 바리데기는 이제 한 여성시인의 자궁 안에서 새로운 삶과 죽음을 ‘죽살이’한다.

“여린 목소리로 말하는 여성시인들의 시는 못 읽어주겠더라구요. 답답하고, 어떤 남성적인 질서 안에서 눈치를 살피는 것도 같고 … 아마도 자기언어를 부려놓을 공간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미리 한정짓는 탓인가 봐요. 뭐, 커다랗게 고함지르고 선언하는 것도 좋진 않지만,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는 시. 그런 게 전 좋아요. 사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게 정말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요? 시인의 현실은 시인이 구축하는 거예요. ”

김혜순 시인은 시가 구축하는 그런 공간을‘유희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시란 단순히 언어에 의해 풀어내고 지시된 것들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은 되레 시를 배반하는 요소들이다.

김혜순 시인은 시적인 언어, 그리고 여성적 언어가 풀려 나오는 과정을 여러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 본다. 바리데기는 어떤 특정한 장르 안에 묶여있지 않다. 그녀는 인간들이 금 그어놓은 여러 경계들, 그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이랄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접경을 오가는 여인이다. 현실과 환상이 맞물리고 전이되는 공간이면 어디든 바리데기가 현존한다. 또는, 바리데기의 등장과 함께 현실은 환상이 되고, 환상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현실로 변한다. 그런 현묘(玄妙)한 착란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르가 바로 영화다.

“‘일 포스티노’같이 직접 시를 언급하는 영화뿐만 아니라, 정말 언어로써 포착하기 어렵고 설명되지 않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어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필로우 북’같은 영화가 그렇죠. 그 영환 여자의 몸에 글을 쓰는 장면, 시공이 뒤섞여서 분할된 화면 등을 통해 시의 본질, 시의 알몸을 보여줘요. 여성적 글쓰기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거죠.”

바리데기, 여성적 텍스트의 한국적 근원
‘필로우 북’ 뿐만이 아니다. 김혜순 시인의 섬세한 시선과 깊은 사유의 두레박은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린 스톱케비치의 ‘키스드’같은 영화들에서도 부재하는 원형의 샘을 길어 올린다. 김혜순 시인은 시인들이 언어로써 미처 퍼내지 못하는 바리데기의 ‘약수’를 발견한 영화감독들이 경이롭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얘기들을 물 흘려보내듯이 펼치면서, 현실 속의 다른 공간을 탐색하는 김혜순 시인의 글들 역시 경이롭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불혹을 넘기고도 여전한 미모를 과시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특이한 걸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앞머리 한가운데가 희끗하게 세어있는 건데, 그게 정말 머리가 센 건지, 미용실에서 색깔을 넣은 건지 분간하기 어렵다. 시인 스스로는 과도하게 시에 몰두해서 그런 거라고 하는데, 그 물든 모양이 여느 미용사의 염색 솜씨 못지 않게 심플하고 앙증(?)맞다.

시인에겐 세월마저도 전속 코디네이터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건가.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건 시인이 낳고 버린 아이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둠을 불 밝히던 ‘영혼의 더듬이’가 불거져 나온 게 아닐까싶다. 상상에 불과하지만, 상상을 업으로 삼는 시인을 두고 내 맘대로 상상에 빠져 보는 게 무슨 잘못이랴. 여하간 그런 염색은 돈 주고 못한다.
(강정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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