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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칼럼] 아산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 ?걸매리? 갯벌 보존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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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천경석 온양고 교사

아산시는 물의 도시이자 바다와 관련이 많았던 지역이다. 전국 최고의 온양온천을 비롯해서 도고온천, 아산온천 등 세 곳의 온천이 있고 아산시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곡교천 등 여러 하천과 수많은 저수지들이 있다. 게다가 아산시의 북서쪽에는 바다가 있으니 물은 아산시의 주요 자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아산시에서 바다에 대한 기억과 관심이 희미해져 있다. 아산만 맨 안쪽에 위치한 아산시 지역은 각종 해산물도 풍부한 편이었다. 아산만은 안성천과 곡교천, 삽교천의 물이 흘러 드는 곳이어서 어종도 다양하고 갯벌이 잘 발달돼 있었다. 또 바다를 통한 교통이 활발했고 역사적 사건도 많았다. 이미 2000여 년 전에 비류가 배를 타고 와서 비류백제를 세웠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온조의 위례성을 천안의 직산으로 볼 때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일대를 비류백제의 미추홀로 본다. 고려 후기에는 수군이 몽골군을 격퇴했고 고려 말 왜구 침입도 있었다. 바다를 통한 이주도 많았다. 고려 중기에는 장영실의 선조 장서가 중국에서 건너왔고 임진왜란 등 전란기에 서울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아산으로 와서 정착하기도 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조창이 설치돼 세곡을 모아 운반하면서 국가의 재정 운용에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유명한 공세리 성당 일대가 조선시대 공진창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공진창을 중심으로 군량미를 조달함으로써 나라를 지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에 나섰을 때 어머님의 유해가 배로 모셔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퍼졌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몰래 드나들던 통로로 이용됐다. 일본이 개항장으로 검토했던 곳이며 청일전쟁 직전에는 청군이 상륙해 주둔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6.25전쟁 때는 유엔군 상륙 소문이 돌고 인민군이 주민들을 동원해서 해안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나라 역사와 지역 주민들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아산만과 바다가 1970년대에 크게 변모됐다. 안성천 하구를 막은 아산호 방조제가 1973년에 축조됐다. 1979년에는 아산시 서쪽을 흘러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삽교천 하구에 삽교호 방조제가 준공됐다. 좀 다른 의미이기는 했지만 아산시는 충무공 이순신이 ‘바다를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고 했던 바다의 대부분을 잃게 됐고 넓은 세상과의 통로였던 바닷길이 막혀 버렸다.

현재 아산시에는 인주면 걸매리 일대 4.6㎞ 정도 길이의 해안선만 남아 있다. 5만분의 1 지도로 채 한 뼘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직선 형태의 제방으로 정비되고 바로 안쪽에 도로가 개설됐다. 서쪽 1/3 가량의 해안에는 산업단지가 들어섰다. 전임 아산시장이 부두와 항만 건설 계획을 추진하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지금 걸매리 갯벌은 주변의 변화로 근근이 숨을 쉬고 있는 형편이다. 그곳은 아산시가 바다와 만나는 마지막 숨구멍이다. 이제 그 작은 숨통마저 잃거나 막히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천경석 온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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