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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칼럼] 멜로극 단골손님… ‘백혈병’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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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혈액내과 김대영 교수

명화로 꼽히는 <러브스토리>, <라스트 콘서트>와 같은 고전부터 80-90년대 신세대들의 감성을 울렸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가을동화>까지. 이 모든 영화와 드라마가 백혈병과 싸우는 주인공을 소재로 한 멜로극이다. 핏기 없는 얼굴, 항암치료로 모두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눌러쓴 모자,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절박하고 애틋한 사랑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과 비극적인 엔딩 때문에 백혈병은 언제나 촉촉해진 눈시울과 함께 긴 여운을 남기는 멜로 소재였다. 극중 백혈병에 걸린 주인공들의 운명은 한결같이 죽음으로 귀결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불치병으로 인해 이별하는 영화에서 유독 ‘백혈병’이 단골 소재로 등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백혈병은 혈액암의 일종으로, 골수 또는 혈액 속에 종양세포(백혈병 세포)가 생기는 질환이다. 백혈병이 발병하게 되면 신체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비정상적인 백혈구 세포들로 인해 정상적인 백혈구 수가 감소하면서 면역저하와 감염증세, 혈소판 감소로 인한 출혈 경향들이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증상들에 의해 생명이 위험해 지게 된다. 백혈병은 진행 속도에 따라 급성과 만성으로, 증식 세포의 종류에 따라 골수성과 림프구성으로 나뉘어 총 4가지로 분류된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백혈병은 그 종류의 상관 없이 생존 가능성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질환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표적 치료제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암환자의 장기 생존은 물론 완치 가능성도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백혈병을 필두로 한 혈액암은 모든 암 중에서도 가장 큰 치료 진전이 이루어진 분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들 질환으로 인한 멜로극 중 사별의 아픔은 더 이상 그 주제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단 시일 내에 큰 변화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네 가지의 백혈병 가운데에서도 가장 긍정적인 치료 결과를 보이고 있는 암종으로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을 꼽을 수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의 경우 그 원인이 되는 유전자변이가 발견되어 해당 변이에 작용하는 표적치료제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1998년 최초의 표적항암제이자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인 이매티닙(글리벡)이 개발되면서 조혈모세포 이식만이 유일한 완치 치료법이었던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후에도 효과와 안전성을 높인 치료제들이 등장, 골수이식 없이도 완치에 가까운 치료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이제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처럼 경구용 약물 치료를 통해 질환을 관리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질환으로 점차 그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 목표는 만성기에서 급성기로의 진행을 막는 것에 있는데, 이는 만성기 환자가 급성기로 진행될 경우 1년 이내로 사망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급성기로의 질환 진행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면서 이매티닙에서 나타난 부작용을 최소화한 닐로티닙(타시그나)과 같은 최신의 치료제도 개발되어, 안정적으로 질환 관리가 가능해짐은 물론 혈액 속에서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완치의 수준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처음 항암제를 투여하고 3~6개월 사이에 나타나는 초기 치료 효과는 환자의 장기 생존율과 연결되는데, 닐로티닙의 경우 투약 초기부터 강력한 반응을 나타내어 지속적으로 치료할 경우 보다 나은 치료 예후를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실제로 진료하고 있는 한 20대 여성 환자의 경우, 발병 당시 발치 후 발생한 염증이 목까지 침범해 호흡이 곤란해 질 수 있는 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이 확인되어 닐로티닙을 투여하기 시작, 지난 1년간 복용한 결과 현재는 직장생활을 지속하면서 정상적인 일상을 아무런 문제 없이 유지하고 있다. 골수검사를 통해 변이가 일어나는 유전자를 확인하고, 여기에 작동하는 표적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서 점차적으로 암세포를 줄여나가며 완치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탈모나 부종, 피부 표백화 현상과 같은 부작용도 상당히 개선되어, 투약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일반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백혈병 치료제의 지난 수 년에 걸친 눈부신 발전은 앞으로도 계속되는 치료법의 연구, 개발과 함께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학의 울타리 속에서 환자들은 ‘불치’나 ‘난치’와 같은 백혈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버리고,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귀 기울임은 물론 자신의 몸과 질환에 대한 관심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런 환자의 치료 의지와 효과적인 치료제를 통한 적절한 치료가 병행된다면, 더 이상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슬픈 이별의 단골손님으로 백혈병을 만날 수 없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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