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자’를 보여주는 데 삼국지만한 게 있나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현세는 연필로 스케치를 한다. 어렵던 시절에 몽당연필에 종이를 말아 쓰던 것이 버릇이 됐다. 웹툰이 대세지만 후배들 몫으로 남겨두고, 자신은 ‘수작업·오프라인’을 고수하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만화가 이현세(59)가 ‘삼국지’를 그린다. 이미 수많은 삼국지가 나와 있는데 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앞에 붙는 이름이 ‘이현세’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공포의 외인구단』 『아마게돈』 『남벌』 등에서 남자들의 땀내 나는 인생을 그리는 데 누구보다 탁월했던 그다. 그가 그려내는 ‘천 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 속 인물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5월 출간 예정인 『이현세의 만화 삼국지』(녹색지팡이) 후반작업으로 바쁜 그를 서울 개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가 삼국지를 기획·완성하는 데는 3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원래 1년 반을 예상했지만, 지난해 1월 초 위암 수술을 받는 등 건강문제 등이 겹치면서 작업이 길어졌다. 수술 후 1년 넘게 금주·금연을 하며 ‘바른생활맨’으로 살고 있다는 그는 “야생성은 많이 줄어든 대신,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늘었다”고 했다.

이현세가 빚어낸 삼국지 캐릭터. 장비·유비·관우(왼쪽부터)가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桃園結義) 장면이다. [사진 녹색지팡이]

 - ‘야생성’이 사라진 이현세라니, 왠지 아쉽다.

 “하하. 그렇지. ‘나쁜 남자’로 살아야 나쁜 남자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데, 조심해야 할 게 많으니 일할 때 신명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래도 겸손해졌다고 할까. 예전엔 나한테도 남에게도 참 못되게 굴었다.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선후배들한테 ‘얼마나 오래 살겠다고’ 싫은 소리도 막 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모든 게 조심스럽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된 느낌이다.”

 - ‘삼국지’를 고른 계기가 있었나.

 “남자 작가라면 한번쯤 자신의 시각으로 풀어보고 싶은 텍스트가 삼국지다. 나는 늘 어떤 ‘인물’을 보여주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는 최고의 작품이다. 이번에도 ‘한 번도 배반을 하지 않은 남자, 조자룡 vs 배반을 하지 않은 적이 없는 남자, 여포’ 이런 식으로 각 인물의 대립되는 특성을 비교하는 식으로 구성했다.”

 - 『고우영 삼국지』와 비교한다면.

 “고우영 선생의 만화는 유머와 해학으로 무장한 철저한 성인용이다. 물론 너무 훌륭하다. 나는 부모와 자식 세대가 함께 보는 걸 목표로 했다. 사실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를 출간하고 나니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은근 기분이 좋았다.(웃음) 기대해도 좋은 건 그림이다. 특히 적벽대전 등의 전투장면에서는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을 보는 듯한 장쾌한 감동이 느껴질 거다.”

 1954년생인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됐다. 하지만 주민등록상의 나이는 두 살 어리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 장교였던 둘째 삼촌 때문에 큰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하고, 셋째 집 장남이던 그가 큰집에 양자로 보내지며 출생신고가 늦어진 까닭이다. 그는 스무 살이 돼서야 ‘삼촌’이라 불렀던 인물이 아버지였음을 알게 됐다. ‘적녹색약’ 판정으로 미대 진학이 좌절되면서 안 그래도 극심한 방황이 시달리던 때였다. “세상이 등을 돌린 것 같던” 그때, 그를 구원해준 것이 만화였다.

 - 굴곡이 많았다.

 “그렇다. 20대는 망아지처럼 보냈고, 30대는 『공포의 외인구단』이 가져다 준 엄청난 성공에 취해 살았다. 40대는 편견과 전쟁(『천국의 신화』 음란물 소송)하다 지났고, 그 내상(內傷)을 다스리다 보니 50대가 끝나 버렸더라. 70대가 되면 동화를 그리는 할아버지로 늙어 가겠다고 오래 전 결심했으니, 이제 만화가로서 승부를 볼 시간은 딱 10년 남았다. 그래서 요샌 하루하루가 아깝다.”

 - 구상 중인 작품이 있나.

 “어떤 작품이 될 지 모르지만, 소시민의 삶을 그린 만화는 평생 못 그릴 거다. ‘까치’처럼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맨몸으로 부딪혀 장렬하게 산화하는 남자가 내 이상형이다. ‘삼국지’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계산 없이 백지 같은 마음으로 전투와 인생에 임하는 조자룡이 가장 좋다. 이런 남자들이 등장하는 만화, 다시 하고 싶다.”

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