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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여명|이조 중엽-말엽 인물중심(37)|유홍열|동학의 개조|수운 최제우(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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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치원의 28대손 순조24년에 출생 최제우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조사회가 급격히 쇠퇴, 부패 혼란하던시기에 있어서 동학이라는 새 종교를 창도하여 새로운 윤리와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보국안민의큰 사명을 완수하려다가 신명을바친 위대한종교가이며 혁명가이었다.
그는순조24연(1824)10월에 경주서쪽 구정리에서 경주최씨 옥(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복술. 이름은 제선이었으며 제우는 그가장성한 후, 자신의 포부에 맞추어 스스로 개명한것이었고, 수운은 호이었다. 신라말의 대문호로 당나라에까지 명성이 높았던 고운 최치원은 28대조이었고, 임신왜란과 병자호란에 있어 조국의 위급을 구한 장군 최운립은 7대조이었으며, 아버지 최옥은 학식과 도덕이 훌륭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수운은 어린시절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기맥이 굳세었으며 용모가 매우 특이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눈꼬리가 가로 쭈욱 찢어져 남달리 빛났다고한다.

<63세에난 만득자 사회혼란에 회의>
이같이 그의가벌은 훌륭하고 그재질 또한 뛰어났지만. 그집안은 이미 돈과 권력이 없는 시골의 한 선비집에 불과하였을뿐더러 그는 아버지가 두번의 상처끝에 단봇짐장사하는 과부 한씨를얻어 63세의고령에 낳은―드물게 보는 희귀한 만득자이었다.―당시사회에서 차별대우를 감수해야한다는 서자이었으므로 그의 출세는 쉬 용납될수 없었다.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에는 아버지를 잃었다. 가장그를 사랑하며 성심으로 공부를 지도하던 부친의죽음은 그로하여금 인생의 무상을 뼈저리게 하였고 가산은 한층몰락해갔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는 당시의 낡고 불합리한 윤리와 부패한 사회질서속에 도사린 말세적인 혼란을 통감하였고 그럼으로써 한때 인생과 사회에 대하여 깊은 고독과 회의에 잠긴다음 점차 비판적·반항적안목을 갖추어 어떻게든지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하였다.

<20세때처자두고 전국대찰을순방>
20세에 드디어 그는가산과 처자를 버리고 감연히 나섰다. 전국의 명산대찰을 두루찾아다니며 혹은 50일 혹은백일, 때로는 1년씩이나 묵으면서 이후 10년간을 「제세구민」의 대도를 얻고자 헤매었다.
그러나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던 불교는물론 이씨왕조에 있어서 교화의 근본이었던 유교조차도 이미 지도원리로서의 구실을 완전히 잃었으며 위로는 세도정치로인한 부패와 혼란이 날로 심하고 아래로는 지방관원과 이원당들의 토색이 극에 달하였으며 밖으로는 영·불·노등 서양열강의 침략이 일층강렬해지는 한편 이른바 서교(천주교)의 전파 또한 우려할지경등임을―한마디로 당시의 현실이 근본적으로 병들었음을 더욱 뚜렷이 인식하는반면, 그가 바라던구국대도는 쉬 터득되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기도서얻어 자각 안수로 주목끌어>
1854년 (철종5) 10월 경주로 돌아온 그는 가산이 거의 없어진 위에 부인 박씨의 친가의 권유를받아들여 울산 유곡의 고암동에다 초가삼간의 살림을 차리고 주야로 수도에 힘써 오직 진리를 탐구하고자 열중하였다.
드디어 1855연3월3일에 최초의 기적이 나타났다. 정좌묵념하고 있던 그에게 금강산 유제사에서 왔다는 중 (승)이 아무도 해득할 수없었다는 글을 바치었는데 그것은 실상 신이 그에게 전해줄 일직의 기희서 (을묘천서) 였으므로, 이후 그는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각하여 더욱부하된 사명을 다할것을 다짐하였다.
1856년 여름에는 천성산에 들어가 49일기도를 드리던중 47일에 숙부의별세를 직관하여 하산하였고 그다음해 가을에 다시 49일기도를 시도하여서는 이를 완수하였다. 이전후부터 그는 노파를 손으로 어루만짐으로써 사 혹은 생케하는등, 종종의 기적을 나타내어 세인들로부터 이인 또는 조술자로서 주목받게되고 그 소문은 널리 전국으로퍼져나갔다. 그렇지만 수운은 몇몇 이술을 얻었을뿐, 구세의 대도를 얻지 못하였음을 크게반성하고 1859년10월에는 다시 경주의 옛집에돌아와 용담정을지어 문밖 출입을 일절 자제하고 오로지 수도와 사삭으로써 우민즉 어리석은 백성의 구제를 자기하였다.

<수도20년에 계시 천사문답 여러번>
약20년에 걸친 위와같은 구도수행끝에 마침내 그는 36세 되던 1860연4월5일에 하늘의 계시를 받을수 있었다한다. 유달리 청명하던 그날 정오께에 갑자기 몸이 떨리고 마음이 끓어오르면서 형언키 어려운 황홀한 몰아경지가 되면서 그는 밖으로 접령의 기운과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을 체험하였다한다.
이계시내용이 바로 동학의 근본교리를 이루는 것인데 이같은 상제와의 대화 (천사문답) 는 이후 9월께까지 여러차례 되풀이되어 상제는 드디어 무극대도를 내리어 중생을 구제케하였고, 그는이러한 종교적경험을 토대로주문과강화를만들었다.
이러한 수운의 종교적 체험은 기실 상제와의문답이란 형태로 자문자답한 바이었고 그러한 내심의 대화를 통해 민간신앙(주술·접신등의 샤머니즘) 을 유불선과 천주교의 영향하에 점차고급종교의 지위로 승화시키려했던 것이다.
대도를 터득하였지만 백성을 구제함이 쉬운일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더욱 수도에 힘쓰는 한편 먼저 그부인에게 입교를 권유하여 성공하였다.1860년정월부러 본격적인 포덕을 시작하여 불과6개월을 지난 동년여름에는 이미 구도자가 운집하였다하고 오래지않아 교단으로까지 발전할수있었다. <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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