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하우스 푸어, 죽음만 보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우리 앞에 K가 서 있다. K의 등 너머로 곤히 잠든 그의 아내가 보인다. K는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둔기로 내리친다. 아내의 비명에도 K는 멈추지 않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피투성이가 된 아내가 그를 붙들고 애원한다.

 “살고 싶어. 여보, 우리 아직 살 수 있어.”

 지난해 10월 4일 새벽 경기도의 한 30평형대 아파트 10층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30대 후반의 회사원 K가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나도 베란다에서 뛰어내리자’고 마음먹은 건 빚 때문이었다. 2008년 봄 아파트에 입주해 스위트 홈의 꿈에 부풀던 그 순간이 지옥의 입구였다. 담보 대출 1억1500만원의 이자를 막느라 사채까지 빌리면서 매달 내야 할 이자는 400만원으로 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목을 졸라오던 어느 날 K의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이자 돌려막기에 사용하던 카드 현금서비스 한도가 40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줄어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빚 독촉의 노예가 된 그의 영혼에 이번엔 죽음이 다가왔다.

 끔찍했던 그날, 아내의 설득에 정신을 차린 K는 119에 신고했다. 그는 아내를 병원으로 옮긴 뒤 경찰에 연행돼 구속됐다. 지난해 12월 수원지법 형사11부(재판장 이동훈)는 살인미수로 기소된 K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법원 관계자는 “재판 과정에서 K의 아내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서도 ‘남편과 재결합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것이 실형 선고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지난주 수요일 오전 서울고법 법정에 수의 차림의 K가 들어왔다. 비쩍 마른 얼굴에 선한 눈빛이었다. 형사6부 정형식 재판장이 물었다.

 - 처와 아이는 어떻게 지내나요.

 “처갓집 근처에 방을 얻어서… 아내가 직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 대출금은 정리됐나요.

 “집을 팔았습니다. (대출금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한순간의 그릇된 마음으로 가족에게, 여섯 살 아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관용을 베풀어주신다면….” 국선변호인 박재용 변호사는 “피고인의 처가 재결합을 원하고 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이 끝난 뒤 박 변호사는 “부인이 한 달 전 구치소에서 남편과 접견 후 마음을 돌렸다. 재판부에 탄원서도 냈다”고 했다. 그녀는 어떻게 남편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박 변호사를 통해 취재를 청했지만 응하지 않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한 가정이 붕괴 상황까지 간 데는 K 자신의 책임이 크다. 감당 못할 빚을 진 것부터 가족의 소중한 생명을 뺏으려 했던 것까지. 다만 그날 밤 K에게 둔기와 베란다 말고 다른 비상구가 보이지 않았다는 건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만약 K가 개인파산이나 회생을 신청했다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김관기 변호사는 “깡통주택이 돼버린 아파트를 내려놓아야 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그가 왜 개인파산을 떠올리지 못했느냐는 점이죠. 지난 5년간 면책 기각률이 높아지고 ‘파산은 나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신청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됐어요. 중산층을 보호해야 할 안전망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비단 K뿐일까. 도덕적 해이를 솎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빚의 수렁에 빠진 가정과 그 가정의 아이도 봐야 한다. 카드사 문자 하나에 평범한 가장이 야수로 돌변하는 사회, 하우스 푸어에게 극단적 선택만 어른거리는 사회는 불온하고 위험하다. 금융피해자협회 박정호 사무국장은 “하우스 푸어들을 위해서는 국민행복기금 같은 신규 대책보다 기존의 파산·회생제도부터 제대로 운용해야 한다”고 했다.

 K의 선고공판은 29일 열린다. 판사들은 죄와 벌을 어떻게 저울질할까. 부부는 행복했던 나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슴 속 막막한 물음들이 같은 곳을 맴돌았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