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또 어떤 ‘기억의 집’을 지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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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호 28면

작년 이맘때 아내와 함께 본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남자 주인공(승민)의 친구 납득이였다. “납득이 안 돼! 납득이!”를 연발하며 대학생 승민이의 연애 고민을 들어주던 재수생 납득이. 내가 그를 좋아한 것은 친구의 실연에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납득은 안 돼도 이해는 했던 것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1>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사실 납득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납득은 일종의 승낙으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반면 이해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인데 공감을 전제로 한다. 납득은 상대가 중요하지만 이해는 전적으로 나 혼자의 문제다. 우리가 가끔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어느 날 문득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를 진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솔 벨로(Saul Bellow,1915~2005)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캐나다에서 태어나 어려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주로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소외를 작품화했다. 197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솔 벨로의 대표작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에서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본인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하는 인물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음의 눈물을 흘린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복받치는 슬픔에 큰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이다.

“그의 체내 깊은 곳에 있는 모든 눈물보가 갑자기 터져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내게 하고, 몸에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고개를 떨구게 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하고, 손수건을 들고 있던 손을 마비시켰다. 목구멍에 맺혔던 커다란 비탄의 응어리가 부풀어 올라와 그는 완전한 포기 상태에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는 마음껏 울었다.”

드물게도 상품시장과 선물거래를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의 처음으로 이제 돌아가 보자. 토미는 계속되는 불운과 실수로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한 호텔에 투숙해 있다. 같은 호텔에 있는 아버지는 은퇴한 노의사로 상당한 재력가지만 고단한 아들의 처지를 동정하기는커녕 밀린 방값조차 내주려 하지 않는다. 별거 중인 아내 역시 오로지 그에게서 돈을 뺏어갈 궁리만 한다.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가보니 동네 불량배들이 주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듯 과거의 실패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좌절해 있는 그에게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탬킨 박사가 함께 투자하자고 속삭인다.

“자네가 증권시장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거야. 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야. 돈을 조금 넣어두고 관찰로 알아낸 원리를 적용하면 돈을 손에 쥐기 시작할 거야. 그러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해 봐야 해. 그래야 투자의 진행과정, 돈의 흐름, 복잡한 전체 구조를 피부로 느끼지. 우리는 단기간에 100% 이익을 남길 거야.”

자칭 정신과 의사인 탬킨 박사의 이야기는 거짓이면서도 진실 같고 억지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게다가 최면을 걸 듯 폐부를 찌르곤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지 잊고 있지. 자신에게서는 그걸 잘 느끼지 못해. 왜냐하면 일상생활의 배경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지.” 그러고는 ‘바로 지금’ 철학을 들려준다.

“사람들을 ‘바로 지금’으로 데려와야 해. 현실 세계로. 현재 이 순간으로 말이야.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

토미는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많이 생각하고 망설이고 한 번 더 숙고하지만, 마침내 어떤 식으로든 행동해야 할 시기가 닥치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바로 그 길을 선택하고 만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열 번이나 이런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도 그랬다. 결국 토미는 전 재산 700달러를 투자해 라드(요리용 돼지기름) 선물을 사지만 닷새 만에 빈털터리가 되고, 탬킨 박사는 사라진다.

토미는 탬킨 박사를 찾으러 거리로 나왔다가 우연히 장례행렬에 떠밀려 교회로 들어간다. 그런데 관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뭔가 풍요로운 느낌을 받는다. “장차 나는 어찌할 것인가? 완전히 발가벗겨져 쫓겨났으니….” 그는 복받치는 슬픔에 큰 소리를 내며 운다. 교회 안에서 우는 사람은 혼자뿐이고, 그는 눈물이 가져다주는 위대하고 행복한 망각으로 빠져든다.

영화 ‘건축학 개론’은 제주도에 새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난다. 너무나 아름다운 집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은 남녀 주인공의 하루하루였다. 그날 승민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을 것이다. “오늘 나는 건축학 개론 첫 수업을 들었다. 거기 한 소녀가 있었다.” 이런 날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 나는 그녀와 시골 간이역을 다녀왔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억의 집을 매일같이 새로 짓는다. 오늘을 재료로 해서 말이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은 또 얼마나 센세이셔널할까?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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